이미지 크게보기 김승업 충무아트센터 사장이 센터 대극장 객석에 앉아 환하게 웃고 있다. 빌 허(虛), 낮을 저(低) 두 한자를 인생 철학으로 삼고 있다는 김 사장은 ‘자신이 문화예술 경영인으로 어떤 장점을 지녔다고 생각하냐’는 질문에 “어느 한쪽에도 쏠리지 않는 균형감각”이라고 답했다. 김낙중 기자 sanjoong@

김승업충무아트센터 사장

어린 시절 ‘수학 천재’로 불리던 한 소년은 과학자의 꿈을 키워갔다. 성장하며 꿈이 구체화돼 해양생물학자가 되기로 마음먹었다. 하지만 대학에 진학하며 부친의 권유로 당시 취업이 잘되던 화학과를 선택했다. 군에서는 벌컨포 레이더 정비병으로 근무하며 전자, 전기 관련 원서를 번역하는 일도 했다. 복학 후 졸업을 앞두고 무역회사에 취직했고, 그곳에서 수출입 업무를 배워 회사 동료들과 함께 회사를 차렸다. 건설중장비와 태양열 집열기를 파는 일을 하며 중동을 휩쓸고 다녔다. 그런 그가 지금은 국내 대표 문화예술 경영인 중 한 사람으로 활동하고 있다. 김승업(64) 충무아트센터 사장이다.

김승업 사장은 지난 1987년 서울 예술의전당 기획위원으로 문화예술계와 인연을 맺었다. 이후 세종문화회관 경영본부장, 김해문화의전당 초대 사장, 부산 영화의전당 초대 사장을 거쳐 올해 1월 이종덕 전 사장 후임으로 5대 충무아트홀 사장에 취임했다. 6월에는 12년간 유지해온 명칭을 충무아트센터로 바꾸고 미래 비전을 발표했다.

‘공대생’ 출신이 어떤 계기로 문화예술 쪽 일을 하게 됐는지 궁금증이 커졌다. 24일 서울 중구 신당동 충무아트센터 사장실에서 김 사장을 만났다. 그가 걸어온 길은 ‘우연’과 ‘도전’의 연속이었다.

“어린 시절 산에 가면 ‘들개’가 됐고, ‘물개’처럼 물에 뛰어들었어요. 바다에서 연구를 하며 선상호텔을 짓는 게 꿈이었죠. 디자인까지 미리 해놨어요. 그런데 아버지께서 꼭 서울대를 가라시는 거예요. 화공과, 기계공학과, 금속공학과를 지원했는데 1지망에는 떨어지고, 간신히 3지망이 됐어요. 포기하고 서강대 화학과에 입학했죠. 대학에 가서도 꿈을 이루려고 물리학, 해양지질학 등을 열심히 공부했어요. 군 제대 후 유학을 가려고 했는데 집안 어른들이 6남매의 장남인 제가 유학을 가면 집안이 어려워진다며 사업을 하라고 권유했어요. 제힘으로 돈을 벌어 유학을 가기 위해 종합상사에 입사했죠. 당시 ‘왕자표’로 유명했던 삼도물산에 들어가 수출입 관련 일을 배운 후 동료들과 함께 회사를 차려 영업과장을 맡았어요. 소방정밀기기를 다루며 1984년에 문화공보부(현 문화체육관광부) 고위 관계자를 알게 됐는데 그분이 대통령 사업으로 짓는 예술의전당의 계약 관련 일을 맡아 달라고 하더라고요. 400억 원대의 해외 기자재 입찰을 도맡아 했어요.”

1988년 예술의전당 1단계 개관 후 그는 다시 회사로 돌아가려 했지만 1년만 더 일해 달라는 당시 이사장의 부탁에 주저앉은 후 본격적으로 건설 공정을 합리화하는 일에 뛰어들었다.

“그때 뛰쳐나올 기회를 놓쳤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무역회사로 돌아가지 않은 게 잘한 것 같아요. 거긴 어느 단계에 올라가면 변화가 없을 거라고 생각돼요. 하지만 이 동네(문화예술계)는 매일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할 일도 무궁무진하거든요. 한마디로 생존 가치가 있는 일을 하는 거죠. 당시 예술의전당 건설 일정이 엉망이었어요. 7만 평이 넘는 부지에 7∼8개의 건물을 3년 만에 짓기로 했는데 불가능한 계획이었어요. 속은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기왕 국가사업에 뛰어들었으니 공직자의 자세로 열심히 하기로 결심했어요. 미군 극동공병단에 있는 친구들의 도움을 받아 건설 일정을 검토해 한 달 후 200페이지 분량의 보고서를 제출했어요. 부분 설계 후 분할 시공을 제안한 보고서를 문공부를 통해 대통령께 전달했어요. 건설 일정이 늦춰지자 당시 문공부 장관이 화를 많이 냈어요. 그렇게 미술관과 예술자료관을 1990년에 완공하고, 1993년에는 오페라하우스까지 지어 전체 개관을 했죠.”

예술의전당이 완공된 후에는 기획부장을 맡았고, 서예부장, 예술자료관 사업개발부장을 거쳐 경영본부장 자리에 오르는 동안 문외한이었던 예술 분야 지식을 발로 뛰며 습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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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때 미술, 음악을 멀리했어요. 아버지께서 예술을 하면 굶어 죽는다며 절대 못 하게 하셨거든요. 그래서 망신도 많이 당했어요. 예술의전당 1단계 개관행사를 맡아 청와대 경호실과 회의를 했는데 기타 줄이 6개라 현악기는 모두 6줄로 돼 있는 줄 알고 바이올린도 6줄(실제론 4줄)이라고 말했죠. 그때부터 국립중앙도서관과 동대문 헌책방을 뒤져 음악과 미술 서적을 닥치는 대로 봤어요. 수시로 공연장에도 다녔고요. 그때 오케스트라 연주를 들으며 졸지 않는 방법을 터득했어요. 악기 개수를 하나하나 센 후 그래도 졸릴 경우 연주자 중 남녀를 따로 세다 보면 인터미션 시간이 오더라고요(웃음). 집에서 미술작품 도록에 습자지를 대고 베끼며 그림 공부를 하기도 했고요. 또 유명 작가와 연주자, 무용가 등이 모두 제 스승이었어요. 지금은 연주를 들으면 어느 작곡가의 곡 몇 악장인지 알 정도가 됐어요.”

예술의전당에 고객서비스 개념을 도입하는 등 할 일을 다했다고 생각한 그는 조용히 문화예술계를 떠나려 했지만 새로운 역할이 주어졌다.

“예술의전당으로 들어오려면 남부순환로를 건너야 하는데 길이 넓어 지하도를 팠어요. 그 안에 악기점, 서점, 사진관, 식당 등을 유치해 모든 걸 다 해결할 수 있도록 했죠. 그러고는 ‘관객’이란 용어를 ‘고객’으로 바꿔 새로운 서비스를 시작했어요. 직원을 뽑아 이런 개념을 교육하고 프랑스, 영국, 바티칸 등으로 보내 실습도 시켰죠. 그런 일들을 하고 나니 ‘내가 할 일은 다했다’는 생각이 들어 예술의전당에서 나왔어요. 가족들과 휴가 한번 못 가봐서 쉬고도 싶었고요. 예술의전당 근처에 고깃집을 차리려 했어요. 돼지고기를 직급에 따라 다른 가격으로 팔려 했죠. 차장까지는 1인분에 5000원 받고, 부장은 6000원, 사장은 1만 원 내게 해서 일부를 모아 공연 협찬을 하려 했어요. 가게 자리도 정해놓고 준비를 하고 있는데 세종문화회관에서 중장기 발전방향을 마련해야 한다며 경영본부장으로 오라고 하더군요. 2000년 초에 세종문화회관에 가서 ‘요정 정치’의 상징이었던 삼청각을 새롭게 바꾸고 리노베이션도 추진했죠. 그런 일을 제게 안 주면 기분 나쁘죠(웃음). 퇴근 후 여관방을 잡아 놓고 세종문화회관의 10년 후를 기획했어요.”

그의 인생에 큰 위기가 찾아왔고, 그 일을 계기로 그는 또 다른 도전에 나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됐다.

“2002년 12월에 사망진단을 받았어요. 집에서 뇌혈관이 터져 8일 동안 의식을 잃고 중환자실에 있었죠. 머리를 열어 골 세척까지 했어요. 다행히 수술이 잘돼 다시 살아날 수 있었어요. 지주막하출혈로 쓰러지면 대부분 몸의 일부를 못 쓰게 되는데 저처럼 1년 만에 완치된 건 드문 경우라고 하더군요. 2004년에 세종문화회관 재개관식에서 경과보고까지 한 후 후배들에게 내가 쌓은 지식을 넘겨주고 지연, 학연 등 아무 연고 없는 김해에서 새로운 일을 시작하게 됐어요. 뇌출혈로 쓰러진 후 문화예술 경영인으로 의미 있는 일을 해야겠다는 결심이 섰어요. 서울에서 나고 자란 제가 제가 김해까지 가게 된 건 새로운 도전이었어요. 김해시장께서 여러 번 내려오라고 하셨지만 ‘어머니를 모셔야 해서 못 간다’고 하다가 생각을 바꿨어요.”

김해문화의전당과 부산 영화의전당 초대 사장을 역임하며 그는 지역민들의 문화 향유 기회를 넓히고, 문화 다양성을 추구하는 등 전문 문화예술 경영인으로 자리 잡았다.

“2005년 김해문화의전당 사장으로 내려가서는 일에만 전념할 수 있었어요. 아들, 딸 모두 유학을 가 있었고 아내와도 떨어져 지내며 집안일을 신경 안 써도 되는 상황이었죠. 뮤지컬 ‘미스 사이공’ 공연을 유치하고, ‘노트르담 드 파리’ 국내 라이선스 초연도 했어요. ‘무역 장사꾼’ 경험을 살려 아트마케팅을 시도했고, 부산 동아대 예술대학원 겸임교수로 학생들을 가르쳤죠. 동아대 강의를 계기로 2011년 영화의전당 사장 공모에 응모해 당선된 후에는 공연과 영화 상영을 접목했고, 볼쇼이 아이스쇼도 유치하는 등 시민들을 위한 공간으로 활용했어요. 그때 미국에서 돌아온 아들이 군에 입대했는데 해운대에 있는 부대로 배치돼 아들과 함께 지낼 수 있는 기회도 얻었어요.”

이종덕 전 사장과 김동호 부산국제영화제 이사장을 ‘롤모델’로 꼽은 김 사장은 ‘자신이 문화예술 경영인으로 어떤 장점을 지녔다고 생각하냐’고 묻자 주저 없이 “어느 한쪽에도 쏠리지 않는 균형감각”이라고 답했다.

“이종덕 사장님은 사람을 정확하게 판단하고 다루는 데 귀재세요. 김동호 이사장님은 약속을 철두철미하게 지키시고요. 제가 그분들을 따라가려면 아직 멀었지만 균형감각만큼은 갖췄다고 생각해요. 충무아트센터의 기존 뮤지컬 관객층을 흡수하며 지역 중장년층도 즐길 수 있는 공연을 만들려고 해요. 또 영화제, 댄스축제 등 다양한 분야를 아우르는 ‘열린 경영’을 펼 계획이에요. 너무 빨리 가는 건 조금 늦추고, 늦은 부분은 당겨주는 속도의 균형도 잡아야죠.”

빌 허(虛), 낮을 저(低) 두 한자를 인생철학으로 삼고 있다는 그는 지치고 힘든 사람들의 ‘쉼터’를 만드는 것을 문화예술 경영인으로서의 마지막 목표로 두고 있다. “뇌출혈로 쓰러졌다 다시 일어나보니 아무것도 없더군요. 그때 겸손하게 살겠다는 결심을 했어요. 그래서 좌우명이 ‘그게 네 거니’예요. 좀 우습지만 사회적 지위와 자리에 연연하지 않고 살겠다는 뜻을 담았어요. 작은 소망이 있어요. 일상에 찌든 사람들이 한두 시간만이라도 편하게 쉴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하는 거예요. 100세 시대이니 새로운 도전도 생각하고 있어요. 제가 살아온 이야기를 담은 책을 쓰고 싶어요. 그리고 악기연주를 꼭 배우고 싶어요. 항상 휴대할 수 있는 해금이 좋을 것 같아요(웃음).”

인터뷰=김구철 부장(문화부) kckim@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