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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미술, 他者서 主體로 끌어올려”

오늘날 단색조로 대표되는 70년대 회화에 대한 열기가 뜨겁다. 하지만 아쉬운 것은 그림에 대한 열기가 시장 중심으로 이뤄진다는 사실이다. 우리 70년대의 단색조 회화에 대한 보다 진지한 성찰과 반성이 필요함에도 불구하고 이렇다 할 연구나 논문 작업이 부족한 가운데 시장에서의 활황으로 ‘돈 되는 그림’으로만 치부되는 현실이 안타깝다.

우리의 70년대 단색조 회화를 논하려면 당시의 시대 상황과 미학적 배경 그리고 추상미술에 익숙하지 않던 시기에 한국사회에 뿌리내리게 된 배경들을 깊이 있게 살펴보아야 한다. 그렇게 보면 새삼 김창열의 존재가 드러난다. 6·25 전쟁의 상처를 담은 추상표현주의 풍의 그림을 그리던 그가 미국을 거쳐 파리에 정착하면서 극사실주의 기법으로 물방울을 그리는 ‘물방울의 화가’가 돼 나타났다.

그의 등장은 아카데믹한 국전풍 그림이 여전히 세를 과시하던 시절 새로운 그림으로 화단을 바꾸어 보려던 일군의 화가들에게 큰 힘이 되어주었다. 소위 프랑스에서도 인정받는 사실적이지만 현대적인 물방울은 한국화단에 명징한 생명수 같은 존재였다.

새로운 그림, 그리되 그리지 않는 그림, 행위로서의 회화, 과정의 회화를 지향했던 그들에게 김창열의 등장은 충격이었다. 그들의 그림처럼 덤덤하게 그리되 그리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화면에 영롱하게 존재하는 물방울, 그려진 것과 그 바탕이 혼연일체가 되어 그림의 바탕의 일부가 되어버렸음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물방울이 매달려있는 듯한 실재감은 기성 작가들에게는 물방울처럼 신선하기만 했고 추상미술에 낯설어하던 관객들에게는 편안한 그림이 되어주었다. 이렇게 단순 명료하지만 그 물방울 너머를 들여다보면 그의 회화는 맑고 투명한 물방울을 통해 존재와 시간의 문제, 현현과 현전의 문제를 제기하는 등 깊은 사유를 필요로 하는 그림이기도 하다.

특히 당대 일군의 작가들은 서구의 추상미술에 경도된 가운데 이에 대해 동경과 혐오 즉 ‘제노필리아(xenophilia)’와 ‘제노포비아(xenophobia)’의 입장을 동시에 지니고 있었다. 그들에게 김창열의 ‘구상성을 띤 추상화’가 파리 현지에서도 인정받고 있다는 사실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특히 방법적으로 평면의 평면화, 행위와 평면의 동화를 통한 일체화를 추구했던 그들에게 김창열 그림 속 물방울은 ‘평면성’에 대한 또 다른 대안이었다.

김창열의 그림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특정 물방울을 형상화했다기보다 물방울이 화면 즉 화포에 흡수되거나 체화 또는 부분으로 침윤됨으로써 지지체와 하나가 된 평면 그 자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단색조 회화가 가고자 했던 방향에 이미 가 있었던 셈이다. 따라서 그의 물방울 그림은 단색조류의 작가들에게 평면성의 당위와 이에 대한 근거가 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편으로는 ‘물방울’이라는 ‘존재’가 ‘존재’한다는 점은 서구현대미술의 언저리에서 타자에 머물던 한국현대미술이 주체로서 자각을 할 수 있도록 용기와 기회를 제공했다.

전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