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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민 정치부 선임기자

정세균 국회의장이 취임 후 기자와 만난 자리에서 말했다. “정치를 해오면서 늘 베버의 말(명제)을 되새긴다.” ‘베버 명제’란 막스 베버가 자신의 책 ‘직업으로서의 정치’에서 정치인의 자질로 열정, 균형감각, 책임의식을 꼽은 것을 말한다. 하필이면 그런 분이 중립성 시비에 휘말리면서 20대 국회 시작부터 여야 대치와 파행의 빌미를 제공한 건 안쓰럽다. 요즘 정치권 유력 인사들과 만나는 자리에서 부쩍 많이 듣는 말이 ‘베버 명제’다. 안철수 전 국민의당 대표는 “책임감과 균형감각이 뒤따르지 않으면 열정은 해(害)가 된다”는 말을 했다. 박원순 서울시장도 “진정으로 소명으로서의 정치를 생각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차기 리더, 대권 주자로 거론되는 정치인들이 ‘베버 명제’를 들고 나오는 데엔 이유가 있을 것이다.

20세기 최고 사상가이자 정치철학자로 손꼽히는 베버는 1차 대전 후 독일 대학생에게 한 강연을 묶어 ‘직업으로서의 정치’를 펴냈다. 작은 문고판으로 140여 쪽에 불과한 책이지만, 지난 한 세기 동안 정치의 본질과 정치인의 자질, 책임윤리와 배신 등에 대한 상상력과 이론적 원천을 제공해온 고전 중 고전이다. 1919년에 책이 나온 다음 해 베버는 세상을 떴다. ‘직업으로서의 정치’가 베버의 ‘유언장’(전성우 한양대 석좌교수)이 된 이유다. 베버는 국가 운영에 참여하는 정치인의 손에 쥐어진 가장 강력한 수단을 ‘합법적이고 폭력적인 강제력’이라 봤다. 따라서 정치를 직업으로 삼겠다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폭력성에 잠복한 악마적 힘들과 관계를 맺게 된다는 것이다. 베버가 정치인의 자질을 유난히 강조한 것은 그 때문이다. 균형감각과 책임의식을 상실한 광기(狂氣)의 열정이 초래한 세계대전이란 가공스러운 결과가 늘 지식인의 트라우마처럼 그를 지배했다.

두 달 후면 대선의 해다. 지금 대선판은 차기 대권을 노리는 정치인들로 넘쳐난다. 현실 정치에 아직 합류하지 않은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을 제외해도 예비 주자들이 10명을 넘어선다. 여론조사 선두그룹을 형성하는 문재인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수백 명의 교수·전문가 그룹을 앞세운 역대급 싱크탱크를 출범시키며 세몰이에 나섰고, 여야의 잠룡들이 저마다 강연이다 민생행보다 성장담론이다 하면서 지지율 올리기에 바쁘다. 하지만 잘 봐야 한다. 중요한 것은 자질 없는 정치 포식자들이 만들어온 위험한 세상에 대한 성찰이고 그런 부류들이 만들어낼 음험한 미래에 대한 통찰이다.

누가 벼락부자처럼 얻은 권력을 앞세워 허풍을 떠는지, 누가 자기 주술의 나르시시즘에 빠져 거짓 왕국을 선전하고 다니는지, 누가 자신이 어리석을 수도 있고 틀릴 수도 있다는 점을 감추고 있는지, 누가 대의적 열정이 아닌 주관적 흥분 상태가 몰고 올 정치적 비극성에 둔감한지를 가려내야 한다. 정치의 계속된 실패는 저성장과 안보 위기라는 이중의 국난에 처한 대한민국을 더 깊은 파멸 속으로 빠져들게 할 수도 있다. 솔직히 지금 수준이라면 큰 희망이 없다. 더 성숙해지고 더 갈고 닦아야 한다. 엄중한 시대에, 대한민국의 차기를 꿈꾸는 정치인들에게 베버의 ‘유언장’을 일독할 것을 권한다. minsk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