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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학용 논설위원

얼마 전 미국의 한 시사 주간지에서 봤던 두 꼭지의 기사가 머리를 맴돈다. 하나는 지난해 미국 교통사고율이 전년 대비 6%포인트 늘어 50년 만에 최대 폭이라는 기사다. 흥미로운 건 그 주범이 저유가라는 분석이다. 기름값이 싸 주행거리가 길어진 게 그 근거다. 다른 하나는 수년 후 출시될 자율주행차가 생활에 미칠 여파에 관한 기사다. ‘차 안에서 업무를 볼 수 있어 집이 직장과 멀어도 무방하다. 주택시장의 주요 변수다. 차는 ‘운행 모드’로 해놓은 채 시내를 돌게 하고, 운전자는 볼일을 보면 된다. 주차 걱정은 안 해도 된다.’ 미국인이 매사 얼마나 멀리 보고 깊이 생각하는지를 보여주는 단면이다. 미국 정부의 정책들이 근원적(根源的)이고 원망적(遠望的)인 배경이기도 하다.

우리는 어떤가. 요즘 사회를 떠들썩하게 하는 ‘3진’(지진·누진제·한진) 사태를 보면 답은 절로 나온다.

경북 경주에서 발생한 규모 5.8의 지진부터 보자. 2주일이 지났건만 규모 6.5 이상의 대지진이 일어난다느니 아니라느니, 활성 단층이 어디 어디에 있다느니, 원전정책을 다시 짜야 하네 마네 등등의 ‘언저리’ 주제에 시간을 허비한다. 화급한 건 그런 논쟁을 과학적으로 규명해줄 정밀 단층조사 착수다. 하지만 아직도 감감무소식이다. 25년 후 결과가 나오는 전국 조사는 차치하더라도 지진이 빈발하고 원전이 밀집한 양산 단층 주변 조사는 당장 해야 하는데도 말이다.

‘자연재해에 관해선 늘 보수적이어야 한다’는 철칙이 있다. 그러나 우리는 ‘더는 지진 안전지대가 아니다’는 경고음이 주야장천 울려댔는데도 설마하며 허송세월만 했다. ‘단견단려’(短見短慮·짧게 보고 짧게 생각)하는 우리의 자업자득이다.

세계에서 유일하게 누진 배율이 11.7배나 되는 주택용 전기요금 누진제 파동도 마찬가지다. 한반도의 아열대성 기후대 편입 속도가 빨라지면서 우리도 한 달 가까운 폭염이 연례행사처럼 온다. 에어컨 보급률도 80%에 달한다. 전기료를 둘러싼 환경이 확 바뀌었다는 얘기다. 하지만 정부는 42년 전 전기 소비 억제와 저소득층 지원을 목적으로 도입한 징벌적 누진제의 근간을 고수하고 있다. ‘요금 폭탄’ 원성 폭발은 당연지사다. 그런데도 정부는 허겁지겁 ‘찔끔 인하’ 카드를 내민 뒤 “개선안을 논의할 테니 조금만 참아 달라”는 식으로 넘어가기 일쑤다.

산업용 전기료 인하가 제조업 경쟁력에 얼마나 도움을 줬는지, 전기 판매의 한전 독점은 바람직한지, 원자력·화력·수력 발전에 의존하는 전기 생산구조는 지속 가능한지 등등. 복잡다기한 변수를 따져보면서 전기료와 에너지 정책에 대한 근본 대책을 내놓아야 할 정부가 선선한 바람이 불고, 겨울만 오기를 기다리니 갑갑할 뿐이다.

한진해운 사태도 근시안적·임시변통적 정책의 산물이다. 정부는 이 문제를 다루면서 초지일관 ‘시장원칙’을 내세웠다. 금융 논리로만 보면 옳다. 결국 한진해운은 법정관리에 들어갔고, 청산 우려는 점점 더 커지고 있다. 하지만 관제 ‘물류대란’을 보노라면 해운업 경쟁력도 고민해야 할 정부가 국내 1위, 세계 7위 국적 해운사의 법정관리 후폭풍을 찬찬히 짚어봤는지 의심스럽다. “기업 구조조정에 정부가 나서면 선무당이 사람 잡는 격이 될 수 있다”는 산업통상자원부 1차관의 최근 발언은 정부의 무책임·무능·무지를 확인해주는 망설(妄說)이다.

긴 호흡의 정책이 실종된 데는 공무원의 책임이 크다. 관료들은 눈에 보이는 성과를 선호하는 정권의 구미를 맞추느라 단기 실적에 급급하다. 그러니 정책의 질도 떨어지고 국민 불신도 커진다. ‘세종 섬’에 갇힌 공무원이 시장과 단절된 채 붕어빵 정책만 찍어내는 단순 기술자로 전락했다는 자조도 들린다. 녹색성장 등 전 정부가 적극 추진해온 중장기 국정이 차기 정부에서 없던 일로 돼버리는 악례(惡例)는 ‘변양호 신드롬’의 전염원이다. 경제권력이 관료에서 국회로 넘어갔으나 ‘포퓰리즘의 공장’에서 국가 비전이 나오기를 기대하는 건 연목구어다.

‘대학’(大學)에 ‘안이후능려’(安而后能慮·편안한 이후에나 깊이 생각할 수 있다)라는 말이 있다. 지금처럼 정치·경제적으로나, 안보적으로 나라가 극도로 뒤숭숭하면 날림 정책은 더 난무하는 법이다. 관료, 정치인, 기업인의 ‘멀리 보고 깊게 생각하는’ 자세가 더욱더 간절히 요구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