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크게보기

김회평 논설위원

기업에 관(官)은 영원한 갑(甲)이다. 세상이 많이 달라졌다 해도 관료가 제동을 걸면 될 일도 안 되는 게 현실이다. 누군가 권력이 시장으로 넘어갔다고 했지만, 기업이 느끼는 역학 구도는 관 우위에서 한 번도 바뀐 적이 없다. 특히나 검찰 수사, 국회 청문회, 특별 세무조사 등으로 곤욕을 치러본 기업이라면 실감은 더 크다. 요컨대 관을 등지고 살 수 없는 게 한국 기업의 숙명이다. 그래서 늘 관의 기류를 살피고 결정적 순간을 대비해 보험을 들어놓는 것이 일상사다. 그렇게 관료와의 스킨십을 전담하는 조직이 기업 대관(對官)팀이다. 기업 규모에 따라 작게는 수 명, 많게는 수십 명이 움직인다. 활동 영역은 세 갈래다. 정부 부처, 국회, 그리고 검찰·국세청 등 사정기관이다. 대관팀의 존재는 한국 기업의 특수한 처지를 반영한다.

그런 대관팀이 ‘김영란법’ 시행을 앞두고 혼란에 빠졌다는 얘기가 들린다. 식사·선물·경조사 비용 한도로 정한 ‘3만·5만·10만 원’ 규정으론 업무 진행이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것이다. 특히 식사비 3만 원으로는 저녁은 물론, 조용한 점심 자리도 확보하기가 쉽지 않다. 대관팀으로선 정부의 정책 흐름이나 규제 동향을 수집할 통로가 끊길 처지다. 대관팀의 존립 문제까지 거론되기도 한다. 그런데 납득이 잘 안 되는 대목이 있다. ‘3만 원’ 규정은 국민권익위원회가 2003년 시행한 ‘공무원 행동강령’ 운영지침에서 정한 한도와 똑같이 맞춘 것이다. 공무원 행동강령은 대통령 시행령으로 공포된 것으로, 이전의 윤리규정 등과는 달리 법적 제재가 가능하다. 공직사회에 3만 원 한도는 13년간 변함없는데 새삼 요란을 떨 일은 아니잖은가. 아니면, 그동안 공직자의 범법 행위가 묵인돼 왔다는 얘기가 된다.

김영란법은 몇몇 위헌 소지를 제외하면 한국사회의 부패 관행을 획기적으로 바로잡을 장치다. 공공연한 접대문화는 공정한 경쟁을 저해하면서 경제 활력을 떨어뜨린다. 지난해 국가별 부패인식지수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4개 회원국 중 27위다. OECD 평균만 돼도 경제성장률이 0.65%포인트 오를 것이라고도 한다. ‘법인카드’가 주도해온 고가 선물의 거품도 제거할 수 있다. 김영란법으로 당장 농수축산업 등이 타격을 입는 것은 안타깝지만, 논의의 본령은 아니다. 문제는 접대 수요가 온존하는 한 법령으로 막는 데는 한계가 있다는 사실이다.

자주 인용되는 사례가 노무현정부 시절이던 2004년 기업의 향락성 접대문화를 개선한다는 취지로 도입한 접대비 실명제다. 50만 원 이상 접대비를 지출할 때 접대의 목적과 접대자 이름, 상대방의 신상정보를 기록하는 제도다. 1년 만에 기업 접대비가 5% 줄었지만, 그 이듬해부터 두 자릿수 증가세가 이어지다 2009년 폐지됐다. 쪼개기 결제 등의 편법이 횡행하면서 제도의 취지가 무색해졌기 때문이다. 김영란법이 시행되기도 전에 참석자 숫자 늘리기, 더치페이 후 현금·상품권으로 돌려주기, 결제 날짜 조정 등 편법 예상 리스트가 나도는 판이다. 접대를 꼭 해야겠다면 틈새는 있다는 뜻이다.

기업인과 관료의 만남을 사시로만 볼 건 아니다. 세종시에 격리된 공무원들은 우수한 자질을 갖췄지만, 시장 흐름에 둔감할 수밖에 없다. 입으론 4차 산업혁명을 말하면서도 과거 문법의 신산업 규제를 버젓이 내놓는 것이 비근한 예다. 시장과 정책이 수시로 만나 정보와 의견을 교환할 수 있어야 서로에게, 또 국익에 도움이 된다. 하지만 김영란법 시행을 앞두고 관가 기류가 심상찮다. 이전에도 기업인을 쉽게 만나주지 않았던 관료들이 아예 문을 걸어잠그려 한다는 것이다. 당분간 책 잡힐 일은 피하자는 식이다. 박근혜정부 임기 말과 겹쳐 복지부동이 심해질 거라는 우려가 나온다.

기업과 공직사회의 투명성을 실질적으로 높이기 위한 방법을 고민해야 한다. 첫째, 김영란법의 선물·경조사비는 놔두더라도 식사비는 현실에 맞게 다소 조정할 필요가 있다. 둘째, 일부 공무원의 ‘부작위 규제’를 없애야 한다. 기업엔 별 이유 없이 일을 미루고 퇴짜 놓는 공무원이 제일 무섭다. 셋째, 외국처럼 로비스트를 양성화하는 방안을 추진해 볼 만하다. 넷째, 기업인과 공무원이 음식점·술집이 아닌 사무실에서 격의 없이 의견을 나누는 문화를 조성해가야 한다. 요컨대 대관팀이 필요없는 기업환경을 만들어야 김영란법도 안착할 수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