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크게보기 신창섭 기자 bluesky@

서울 만리동 ‘성우이용원’
초가집 슬레이트지붕으로 개량
철 지난 물건 가득해 향수 자극

백화점·쇼핑센터 ‘바버숍’
면도에 수염 · 눈썹까지 다듬어
중년남성 눈치 안보고‘멋 내기’

내가 어렸을 때, 이발소는 남자들의 공간이었다. 남자는 이발소, 여자는 미용실을 가야 하는 것으로 알았다. 이발소에서는 머리 손질뿐만 아니라 거품면도도 해주었는데 이 때문에 이발소를 찾는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이발소 스타일이 세련되지 못하고 인테리어가 뒤떨어진다고 느낀 남자들은 이발소를 기피하기 시작했고, 일부 퇴폐업소의 나쁜 이미지가 더해지면서 이발소의 숫자는 점점 줄어들어 서울 같은 대도시에서는 찾기 힘든 곳이 됐다. 그러나 남자들은 미용실을 이용하면서 거품면도만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 전통적인 남자들의 공간을 함께 잃어버린 것을 알아채지 못했다. 남자와 여자가 평등한 세상에 남자만의 공간이 뭐 필요하겠냐고 반문할 수 있겠지만, 남자들이 자동차에 열광하는 것이 자동차가 남성적인 물건이어서가 아니라 자신만의 공간을 확보하기 위한 노력이라는 어느 사회문화학자의 지적을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잃어버린 남자들의 공간을 90년간 한자리에서 지키고 있는 곳이 있으니 서울 만리동 고개의 성우이용원(왼쪽 사진)이 바로 그곳이다. 얼핏 보기에도 오래돼 보이는 이 이발소 건물은 200년이 됐다고 하는데 깨진 슬레이트 지붕 아래로 보이는 볏짚이 이 집의 나이를 짐작하게 한다. 예전에는 오래된 초가지붕을 개량하면서 덮여있던 짚을 그대로 두고 그 위에 새 지붕을 얻는 경우가 종종 있었는데 농촌에서도 보기 힘든 초가집이 서울의 가장 중심부에서 슬레이트 지붕으로 위장한 채 아직 남아있는 것이 신기하기만 하다. 이발소의 전면부와 측면에 커다란 격자무늬의 창문이 있어 따스한 햇볕이 실내로 가득 들어온다. 오래되어 일그러진 창문이지만 창살의 모양과 문짝은 요즘 카페에서 유행하는 빈티지 창문을 닮아있다. 의자의 기울기를 조절하는 쇠 손잡이가 달린 밤색 이발 의자와 이용원 한구석의 하늘색 타일 세면대는 시간을 거슬러 어린 시절로 되돌아간 것 같은 기분이 들게 한다. 무엇보다도 연세 지긋한 이발사의 구수한 옛날 이야기와 오래된 시간만큼 벽면 곳곳에 가득 채워진 철 지난 물건들로 과거에 이발소를 경험했던 장년뿐 아니라 호기심에 찾아오는 젊은이들까지 이곳의 분위기에 매료되어 단골이 되기도 한다고 주인장의 자랑이 대단하다.

과거의 이발소가 사회적 규범에 의해 남녀를 구별했다면 요즘 새롭게 등장하고 있는 바버숍(오른쪽)은 자발적인 남자만의 공간으로 만들어졌다. 새롭게 등장한 바버숍은 그동안 미용실이 어색했던 중년의 남성들이나 색다른 스타일을 원하는 신세대 남성들에게 환영받고 있다.

외모에 관심이 많은 젊은 남성들은 이곳에서 수염을 기르고 눈썹을 다듬고 개성 있는 머리스타일로 변신을 꾀한다. 면도서비스는 물론이고 가끔 제공되는 위스키를 마셔보면서 남자임을 느낀다. 손님뿐만 아니라 기름칠한 머리와 문신으로 치장한 바버들과 유럽풍의 멋진 인테리어 소품들로 가득한 이곳은 스스로 남자들의 전용공간임을 드러낸다. 한편 점점 흐려지는 머리숱으로 위축된 중년남성들도 주변의 눈치를 보지 않고 이곳에서는 호기 있게 멋을 부려본다. 사실 미용실에서 용기 내어 들춰본 스타일 책에는 온통 젊은이의 머리뿐이고 이발소를 찾기에는 왠지 시대에 뒤떨어진 느낌이 들었던 중년남성들에게 바버숍의 등장은 더 반가울 수밖에 없다. 이런 인기에 힘입어 대형 백화점과 쇼핑센터에서도 바버숍을 만날 수 있다.

남자들의 전용공간인 이발소가 바버숍으로 변신하면서 이름만 영어로 바뀐 것이 아니라 남자들에게 필요한 용품이나 휴식공간을 갖춘 다기능공간으로 체질개선까지 하고 나섰다. 머리를 다듬는 공간은 물론이고 분위기에 맞는 의상이나 남성용 화장품을 소개하는 공간도 함께 제공한다. 유럽풍의 낡은 가구와 수공예 장식물로 가득한 바버숍은 남자들에게 독특한 개성을 만들어내는 새로운 문화공간으로 인식되고 있다.

건축가·디자인연구소 이선 대표

이미지 크게보기 김낙중 기자 sanjo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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