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크게보기 서울시립미술관의 천경자 1주기 추모전을 찾은 관람객들이 최근 작가의 서명(그림 왼쪽 하단)에 문제가 있다고 해 위작 의혹이 제기된 작품 ‘뉴델리’를 감상하고 있다. 곽성호 기자 tray92@

- 천경자 ‘뉴델리’ 진위 논쟁에 냉담한 반응

“재료분석 등 기본조사 안해
전시만 보고 주장 믿음 안가”
소장가도 “千씨에게 직접구입”
대형 경매사 기록 남아있어
전문 검증도 한번 거친 셈

고 천경자 화백이 자신의 작품이 아니라고 주장한 ‘미인도’와 위조범 수사과정에서 경찰에 압수된 이우환 화백의 ‘점·선 시리즈’ 일부 작품들의 진위가 판가름 안 된 상태에서 서울시립미술관에 전시된 천 화백 작품 ‘뉴델리’에 대해 또다시 위작 의혹이 제기되자 미술계는 당혹감을 금치 못하고 있다. 미술계 인사들은 전시된 작품만 보고, 그것도 하단의 서명을 중심으로 위작 운운하는 것은 ‘소모적인 논쟁’만 불러일으키는 무책임한 행태라고 지적한다.

미술품 감정 분야 전문가인 이동천 박사는 21일 출간한 책 ‘미술품 감정비책’(출판사 라의눈)에서 내달 7일까지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이어지는 천 화백의 1주기 추모전 ‘바람은 불어도 좋다. 어차피 부는 바람이다’에 걸린 107점의 작품 중 개인 소장자로부터 대여한 1979년 작 ‘뉴델리’가 위작으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이 박사는 가장 먼저 그림 왼쪽 아래의 서명을 문제로 삼았다. 이 박사는 특히 앞글자 ‘뉴’에서 ‘ㅠ’ 자의 왼쪽 획이 바깥쪽으로 삐쳐 있는 점을 지적했다. ‘뉴’라는 글자가 들어간 천 화백의 다른 서명 10여 점을 모두 찾아 비교해도 이렇게 왼쪽 획이 바깥으로 삐친 사례는 없다는 것이다. 또 위작으로 지목한 뉴델리의 서명에는 개칠(덧칠)한 흔적도 있다고 이 박사는 강조했다. 이와 함께 서명과 별개로 이 박사는 천 화백의 다른 그림에서 발견되는 검은색이나 고동색 펜 드로잉 흔적이 뉴델리에선 나타나지 않는다는 점을 지적했다.

이 박사의 이 같은 주장에 대해 최열 미술평론가는 “감정은 육안과 출처 확인, 재료 분석 등이 기본인데 이 박사는 전시장에 가서 그림만 보고 작품의 진위를 말하고 있다”며 “시립미술관으로부터 위탁받아 직접 그림을 만져보며 감정한 것도 아니어서 믿음이 안 간다”고 꼬집었다.

최 평론가는 여기에 덧붙여 “이 박사는 2008년 출간한 책 ‘진상 : 미술품 진위 감정의 비밀’ 출간 당시에도 1000원권 지폐에 실린 ‘계상정거도’(보물 585호)가 가짜라고 주장해 파문을 불러일으킨 적이 있다”며 “당시에도 지금처럼 도판만 보고 위작 주장을 펼쳤다”고 말했다. 계상정거도 위작 논란은 문화재위원회의 감정 결과 진품으로 결론 나며 종결됐다.

또 감정의 주요 근거 중 하나인 그림 소장 이력에 있어서도 이번에 서울시립미술관 전시에 그림을 대여해준 임경식 이목화랑 대표는 “자신이 직접 천 선생님에게서 구입한 것”이라며 “위작 논란 자체가 성립이 안 된다”고 주장한다.

임 대표는 “1980년대 초반 대구에서 화랑을 할 때 천 선생님 작업실이 있던 홍익대 인근 서교동에서 직접 구입해 개인 컬렉터에게 판매했다가 4, 5년 전 다시 사서 가지고 있던 것”이라며 “선생님은 기분에 따라 필적도 달라지고 드로잉을 안 할 때도 있는데 감정에 정작 중요한 그림은 제쳐놓고 사인의 필적이나 드로잉만 가지고 위작이라고 말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말이 안 된다”고 항변했다.

또 이 작품의 유통 이력 중에는 대형 경매사의 경매기록도 남아있다. 2008년 K옥션에 출품됐다가 유찰된 적이 있는데 감정에 철저한 대형 경매사의 검증도 한 번 거친 셈이다. 당시 K옥션 기록을 보면 3월 26일 경매에 출품된 뉴델리는 24×33㎝ 사이즈의 그림으로 1979년 작이며 추정가는 1억5000만 원에서 1억8000만 원에 이른다고 돼 있다.

한편 얼마 전 경찰에 압수된 이우환 화백의 ‘점·선 시리즈’ 작품 12점을 감정해 모두 위작이라고 판명했던 최명윤 국제미술과학연구소 소장은 “서로 진위를 놓고 소모적인 논쟁을 벌일 것이 아니라 어차피 문제가 제기된 만큼 이를 공론화해 논의해 나가는 것이 바람직해 보인다”고 말했다.

이경택 기자 ktlee@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