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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범 논설위원

성주 군민들이 무슨 잘못이 있겠는가. 자식 공부시키기 위해, 먹고 살기 위해, 꽤나 키우기 힘든 참외를 부지런히 길러 열심히 내다 판 죄밖에. 겨울 끝자락인 3월에 서둘러 씨앗을 소금물에 씻어 두었다가 4월에 파종한 후 옮겨 심고, 수확하는 7월 중순까지 땡볕 아래 땀 뻘뻘 흘리며 애지중지 키웠다. 이런 노고로 번 돈이 작년에만 4020억 원이다. 올해 군 예산 3997억 원을 웃돌 정도다. 그런데 마른하늘에 날벼락이다. 목숨 같은 참외에 전자파라니. 듣도 보도 못한 사드 레이더라니. 무해하니 유해하니 따질 경황도 없다. 전자파 참외를 누가 사 먹겠는가. 덜컥 겁부터 났다. 겁은 분노로 바뀌고, 분노가 다시 그들을 시위장으로 이끌었다. 순식간이었다. 이런 성주 농민들에게 누가 돌을 던지겠는가. ‘국가 안보는 성주 아닌 다른 지역에서나 지키는 것이냐’고. ‘북핵과 미사일 위협이 남의 나라 일이냐’고.

오래전부터 우리 사회에는 ‘설마 북한이 핵을 남쪽에 쏘겠어?’ ‘북한은 대남 전면전을 벌일 능력이 없어’ ‘북한은 남침을 하지 않을 거야’ 하는 생각이 은연중 똬리를 틀고 있다. 누가 가르치지도 않았는데 왜 이렇게 됐을까. 역대 정부의 대북 정책은 매번 달랐다. 정권마다 같은 북한을 다르게 해석했다. 박정희의 북한과 김대중의 북한이 달랐고, 노무현의 북한, 이명박의 북한이 또 달랐다. 박정희 정부는 최초의 남북 합의인 7·4 남북 공동성명을 통해 민족·평화·자주라는 ‘달콤하고 환상적인’ 3대 통일원칙을 합의했다. 김대중 정부 땐 북한은 안심해도 될, 햇볕정책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대상이었고 6·15 정상회담 후 “한반도에 더 이상 전쟁은 없다”는 선언까지 나왔다. 노무현 정부는 현찰과 전략 물자를 퍼부으며 6자 회담으로 북핵을 해결할 수 있다는 신기루를 만들었다. 박근혜 정부는 ‘통일 대박론’으로 또 다른 환상을 심었다. 남북 정상이 껴안는 역사적인 두 번의 회담 장면은 이런 분위기의 결정판이다. 이런 정책들은 나름대로 남북 긴장은 완화시켰지만 제대로 성공한 것은 아직 없다. 북한을 제대로 읽지 못해 대부분 실패했으며 오히려 북한의 고압적 자세를 고착화시켰다. 대북 정책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이다. 이젠 남북 관계가 김정은의 ‘창의력’에 달려 있는 형국이다.

역대 대통령들은 참으로 쉬운 승부를 해왔다. 남북경제협력, 이산가족상봉, 고위급회담 등 말초적이고 단기적이며 결과가 빨리 나타나는 것에 집착했다. 서울에서 핵폭탄이 터지면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고 다치는지, 방사능 오염과 낙진 피해가 얼마나 심각한지 얘기하는 정부가 있었던가. 울산·포항·여수 등 국가 주요 산업시설이나 에너지 시설이 파괴되면 대한민국이 국가로서 존립이 가능한지 연구·분석한 정부를 봤는가. 전기가 끊어져 50층, 80층 초고층 아파트는 걸어 올라가야 하고, 수돗물조차 공급이 안 되는 원시의 고통을 말하는 정부는? 방사능 낙진 대응 훈련을 하거나, 핵 방사능에 노출된 후의 응급처치를 배운 적은? 그런 정부를 만났더라면 안보 불감증이 이렇게까지 심각해지진 않았을 것이다. 사드는 논란조차 되지 않았을 것이다. 이젠 원자폭탄이나 핵폭탄이란 용어조차 쓰지 않는다. 그저 북핵이라고 부르며 스스로 무감각을 키우고 있다. 안보 불감증의 근저에는 정권마다 바뀌는 대증요법 식 대북 정책이 존재한다. 전쟁에 대한 경계는 사라지고 통일 환상만 난무하니 북한이 도발을 하든, 핵무기를 만들든 ‘한반도에 전쟁은 없음’이란 도그마는 굳건하다. 그래서 성주 군민들은 오히려 피해자이자 희생양이다. 통일문제처럼 어려운 문제도 없다. 간혹 북한과 어려운 싸움을 하며 근본적인 변화를 이끌어 내려던 시도도 있었지만 반통일적이란 공격을 받았다. 효과적이고 생산적인 대북전략도 햇볕정책의 프레임에 갇히기 일쑤였다. 그래서 정권이 바뀌어도 변하지 않는, 원칙이 확고한 일관성 있는 대북 정책이 필요하다. 민족의 장래까지 염두에 둔 긴 호흡의, 헌법과 같은 통일 정책이 필요하다. 그것을 위해선 3년 동안 온 나라가 폐허가 되고, 18만 명의 미군과 국군이 희생당하고, 100만 명에 가까운 민간인이 죽고 부상한 6·25전쟁의 참상을 잊어선 안 된다. 북핵·미사일의 위험성도 잊어선 안 된다.

“당신은 전쟁에 관심이 없어도 전쟁은 당신에게 관심이 있다.” 러시아 혁명가 레온 트로츠키의 말이 새삼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