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크게보기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가 지난 2013년, 4만3000명이 사망하고 20만 명 이상이 수감됐던 독일 남부 다하우 나치 강제 수용소를 방문해 고개를 숙여 사과하고 있다. 자료사진
공개 사과의 기술 / 에드윈 L 바티스텔라 지음, 김상현 옮김 / 문예 출판사
‘민중은 개돼지’라고 발언한 나향욱 전 교육부 정책기획관이 국회에서 눈물의 사과를 했지만 여론을 되돌리진 못했다. 사실을 인정하지 않은 해명과 ‘본심이 아니었다’, ‘영화 대사를 인용했다’는 변명은 오히려 여론을 악화시켰다. 이뿐 아니라 우리 사회에서 뒤늦은 사과, 잘못된 사과로 상대를 더 자극하고 사태를 걷잡을 수 없게 만든 경우는 비일비재하다. 가습기 살균제 사건 당사자인 옥시는 피해자 가족에 대한 사과와 배상 책임을 회피하다가 사태를 악화시켰고, 2014년 땅콩 회항 사건은 거짓 해명으로 봉합하려다 되돌릴 수 없는 갑질 비난을 촉발시켰다. 도대체 이들의 사과는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
사람들은 누구나 실수를 한다. 말실수를 하고, 거짓말을 하고, 진실을 숨긴다. 경솔하고 무례하며 모욕감을 줄 때도 있다. 어떤 이들은 중대한 범죄를 저지르기도 한다. 이때 스스로 잘못을 깨달아 양심 내부의 목소리에 의해 사과할 필요를 느끼기도 하고, 자신의 뜻과 다르게 사회적으로 요구받기도 한다. 이때 어떤 이는 적절히 사과하고 상황과 맥락에 맞는 언어를 사용해 훼손된 관계를 복구하지만 어떤 이는 부적절한 사과로 잘못을 바로잡기는커녕 오히려 새로운 문제를 일으킨다. 이 차이는 무엇인가. 언어학자 에드윈 L 바티스텔라 미국 서던 오리건대 교수의 ‘공개 사과의 기술’은 이 문제를 파고든다. ‘사과가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언어학, 사회학, 문화적 맥락을 동원해 분석한다. 사과 잘하는 10가지 방법 같은 자기계발서는 아니라는 점을 밝혀둔다.
사과란 무엇인가. 저자는 사회학자 어빙 고프먼과 니컬러스 태뷰치스의 정의를 혼합해 설명한다. 우리 삶을 연극으로, 우리 일상을 개인의 상황에 따른 역할극으로 본 고프먼은 사과도 역할론으로 풀어낸다. 그에 따르면 사과는 자신을 잘못한 자신과 가치 있는 자신으로 분리해 잘못한 자신을 과감히 던져 버리는 행위이다. 이때 완전한 사과가 되려면 규칙 위반을 인정하고, 수치심과 유감을 표현하며 이에 따른 외면이나 배척에 공감해야 한다. 특히 잘못된 행위를 명시적으로 인정하는 것이 핵심이다. 논리적이고 명시적인 사회적 의례가 중요하다. 반면 태뷰치스는 사과는 연출 기법보다 근본적으로 도덕적이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개인의 진실에 더 비중을 둔 해석으로 가해자가 사과함으로써 진심으로 스스로 도덕적으로 취약한 위치로 내려가면 피해자가 그 진위를 판단한다.
어떤 경우든 사과는 두 단계를 거친다. 가해자가 잘못을 인정하고 피해가 발생했음을 인정하는 ‘적시’와 잘못에 대해 미안하다고 말하는 ‘보완’ 단계다.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적시’는 흔히 말하는 ‘고백’인데 ‘고백록’을 쓴 장 자크 루소와 성 아우구스티누스식 고백이 다르다. 아우구스티누스식 고백은 사과할 때 어떤 잘못을 저질렀는지 죄의 세부사항을 명확히 밝히는 반면 루소식 고백은 구체적 설명보다는 순수성과 진실성에 초점을 두는 것이다. 루소는 언어가 한 사람의 내적 깊이를 정확하게 표현할 수 없기에 정밀하게 계산된 언어보다는 오히려 반 수사적이고, 정제되지 않은 순수함과 진실성이 필요하다고 했다. 물론 현실에서 사과는 고백이 아니라 자기 합리화나 핑계인 경우가 더 많다.
이렇게 사과에 대해 깊이 살피는 과정에 숱한 사례들이 등장한다. 1600년대 미국 세일럼에서 벌어진 마녀 재판에 참여했던 판사의 사과, 워터게이트사건 당시 리처드 닉슨 대통령의 사과, 섹스 스캔들에 휘말린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의 사과, 영화배우 멜 깁슨의 유대인 발언에 대한 사과, 각종 스캔들과 사건 사고에 휘말린 유명인의 사과 등 30여 건의 사례를 통해 사과의 본질, 성공과 실패의 이유를 분석한다. 하지만 저자는 하나의 정답을 내놓지 않는다. 상황에 따라, 사람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진심이 있다고 모두 전달되는 것이 아니며, 정교한 언어와 고도의 전략이 성공적인 사과를 보장하는 것도 아니다.
저자가 말할 수 있는 유일한 결론은 ‘사과가 받아들여지느냐 아니냐의 결정은 전적으로 피해자에게 달렸다’는 것이다. 사과는 하는 것이 아니라 받아들여질 때 비로소 완성된다. 이는 개인이나 집단, 국가의 사죄에도 해당된다. 전략적인 사과도 있겠지만 진심을 진심으로 보이게 함으로써 결국 받아들여지는 상호 이해. 사과는 관계와 커뮤니케이션의 매우 어려운 단계인 것만은 분명하다. 그래도 출발은 루소식 고백일 것이다. 계산되지 않은 진실함 아니겠는가.
최현미 기자 chm@munhwa.com
;){kind=link}
;){kind=lin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