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크게보기

이현종 논설위원

박근혜 대통령이 정계에 입문하기 전인 지난 1991년 2월의 어느 날 일기에 이런 글을 썼다. ‘옛 사진을 정리하면서 당시 내가 알고 있던 그들과 지금 내가 알고 있는 그들이 한결같은 경우가 그야말로 드물었다. 지금의 내 주변도 몇 년 후 어찌 변해 있을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사람들과의 만남이 허무하게만 느껴진다.’

2018년 2월 25일 박 대통령이 청와대 문을 나간 후 일기장에는 어떤 글을 쓰게 될까. 그때에도 자신 있게 ‘영원한 친박’이라고 하는 ‘진박(眞朴)’이 얼마나 남아 있을지 궁금하다. 친박계의 좌장인 최경환·서청원 의원이, 아니면 대통령을 ‘누나’라 부르는 윤상현 의원이, 친박의 별동대 역할을 하는 김태흠·이장우 의원이 친박계로 남아 있을까. 아마 박 대통령은 일기장에 ‘믿었던 ○○○마저 이럴 수 있는가’라는 배신과 한탄의 글을 쓸지 모르겠다.

박 대통령은 1993년 출간한 책 ‘평범한 가정에 태어났더라면’과 2007년 펴낸 ‘절망이 나를 단련시킨다’는 자서전에서 사람에 대한 배신감을 많이 토로했다. 최고 권력자의 위치에 있었던 부모를 모두 총탄에 잃고 힘들었던 삶을 지탱해 오면서 형성된 큰 트라우마였을 것이다. 정계에 입문하기 전 은둔에 가까운 생활로 다양한 사람을 두루 만날 기회가 부족했기 때문에 인적 풀이 제한적이었다. 아버지 박정희 전 대통령과 관련이 있는 인물이나 자신의 측근 그룹에서 천거한 인물을 수첩에 적어 놓았다가 기용해 왔다. 그 인물에 대한 다양한 평가를 세상의 눈보다는 자신의 눈을 절대적 기준으로 삼아 인사 발표 때마다 ‘저 사람은 아닌데’하는 반응이 많았다. 집권 후 인사 파동 사례만도 총리, 장차관 등 이루 헤아릴 수도 없다.

홍기택 전 산업은행 총재의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 부총재 사퇴 파동을 보면 수첩의 폐해가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홍 전 총재는 박 대통령의 서강대 동문으로 경제교사그룹의 일원이었다. 그러나 중앙대 경제학과 교수인 홍 전 총재는 10년에 한 편 정도밖에 논문을 쓰지 않을 정도로 학계 성과가 좋지 못하다. 오죽했으면 지난 2013년 당시 조원동 전 경제수석이 홍 전 총재에게 산은 총재 내정 사실을 통보하면서 “산은 회장에 임명될 것 같은데 사양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일 많고 복잡한 자리라 안 어울리는 자리입니다”라고 했을까. 인수위 시절부터 최근까지 홍 전 총재가 보인 ‘기행(奇行)’을 보면 박 대통령이 무슨 기준으로 인물을 평가했는지 의아하다.

지난 1년간 여권 갈등의 핵인 ‘유승민의 배신’ 문제도 박 대통령의 편협함 때문에 총선 참패와 친박 분열이라는 재앙적 결과를 낳고 말았다. 4·13 총선의 핵심 이슈가 된 배신의 정치 심판론의 결과는 어떤가. 박 대통령이 그렇게 국회에 진출시키려 했던 대구·경북(TK) 진박 15명은 지난 13일 사드의 경북 성주 배치 결정과 관련해 단체로 성명을 발표하고 정부를 비판했다. 김해 신공항 결정에 대한 반응도 마찬가지다.

반면 유승민 의원은 되레 박 대통령의 결정을 뒷받침하고 나섰다.

대통령이 고뇌 끝에 안보를 위해 내린 결단을 그의 최측근이라는 사람들이 오직 지역구 표에 기대 대통령을 비판하고 나선 모습이야말로 진짜 배신의 정치가 아닌가. 박 대통령이 얘기한 ‘겉과 속이 다르지 않고 소신 있는 사람’이라면 성주 군민들에게 물병을 맞더라도 대통령의 뜻을 설득하려고 나서야 하건만 그런 국회의원이 한 명도 없다는 것이 진박의 현주소다. 박 대통령이 “나는 계파를 만든 적이 없다”고 위안해 봐도 친박 내 배신의 정치는 이제 피할 수 없는 길이다. ‘배신은 가장 가까운 곳에서부터 시작된다’는 정치권의 징크스는 박 대통령을 비켜가지 않았다.

이제 남은 임기 1년 7개월. 박 대통령이 후회를 덜 하기 위해선 인사 난맥의 원인인 수첩부터 버려야 한다. 대통령 앞에서는 충성하는 척하면서 갈등 해결 능력이라곤 눈곱만큼도 없는 장관·비서진을 전면 교체하고 정말 탕평인사를 통해 잘할 수 있는 인사들로 진용을 새롭게 짜야 한다. 정권 재창출 문제는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새누리당의 자유경쟁에 전적으로 맡겨두고 박 대통령은 국정과제들을 풀어나가는 데 집중한다면 최악은 피할 수 있다. 박 대통령이 남겨야 할 것은 친박이 아니라 대한민국의 비전과 국정의 성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