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란法과 골프

199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안기부’ ‘보안사’ 등 기세등등하던 사정 기관에서 나온 직원들이 골프장 사무실을 수시로 들락거렸습니다. 골프 치는 공직자를 색출하기 위해서였죠. 프런트에 비치된 내장객 명단은 기본이고, 주차된 차량의 번호까지 일일이 체크하는 게 그들의 일과였습니다. 골프장을 드나들던 공직자들은 골프백은 물론 방명록에 ‘가명’을 쓰며 감시를 피해왔습니다. 이 때문에 10살짜리 아들이나 작고한 지 20년이 넘은 아버지 이름이 버젓이 내장객이 되기도 했습니다.

소위 ‘김영란법’으로 불리는 ‘부정청탁 및 금품 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이 오는 9월 28일 시행을 앞두고 있습니다. 이 법의 적용범위가 공직자는 물론 언론인, 교직원까지 확대돼 시행 전부터 논란이 일고 있습니다. 한국경제연구원은 이 법의 시행으로 연간 11조6000억 원 이상의 경제적 손실이 예상된다며 정치권에 보완책이 필요하다는 보고서를 내놨습니다. 이 가운데 골프장 손실은 10%인 1조1000억 원에 달한다고 합니다. 골프 접대가 그만큼 많다고 본 것입니다.

하지만 법 시행을 앞두고 내장객이 30∼40% 줄어들 것이라며 아우성쳤던 골프장 업계는 예상외로 조용합니다. 속내는 모르겠지만, 겉으로는 차분해 보입니다. 이유가 있었습니다. 지난해부터 그린피가 면제되고 오직 세금(1인당 2만1120원)만 내는 10억∼20억 원짜리 ‘무기명 회원권’은 없어서 못 판다고 합니다.

이 회원권은 일반 회원권보다 서너 배는 더 비싸지만 4명이 특별회원 대우를 받아 접대비 한도인 3만 원을 피해갈 수 있고 무엇보다 누가 이용했는지 알 수 없는 ‘묻지 마’ 성격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래서 주로 법인이 보유하고 있다고 합니다. 한술 더 떠 골프장에서도 백화점 상품권을 받거나, 그린피 결제 기능이 있는 라운드 전용 상품권을 발행하려는 골프장도 늘고 있습니다. 누가 와서 누구랑 골프를 치고 갔는지 확인 불가라는 것이죠.

한 골프장 사장은 사석에서 예전 서슬 퍼런 군사정권 시절 횡행하던 편법이 다시 활개를 칠 거란 얘기를 했습니다. 그러면서 골프장도 신분증을 제시하는 실명제를 하거나, ‘무인 과속 단속기’처럼 골프장 프런트마다 CCTV를 설치해 사정 당국이 감시하면 이런 편법과 꼼수를 막을 수 있을 것 같다는 농담을 던지기도 했습니다. 꼼수에 대한 강력한 대책이 될 수는 있겠으나 실현 불가능한 대안인 것 같습니다. 김영란법은 한마디로 ‘자기 지갑’을 열라는 얘기입니다. ‘남의 지갑’을 빌리면 안 된다는 게 법 취지입니다.

mschoi@munhwa.com

문화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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