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크게보기 세계 최초의 증권거래소인 카이저 거래소의 당시 중정 모습을 담은 그림. 그 뒤 암스테르담 증권거래소로 이름이 바뀌면서, 최초로 유가증권 거래를 공식적으로 시작했다. 이콘 제공

이미지 크게보기 1903년 문을 연 베를라흐 거래소. 현재 전시공간으로 쓰인다 .

세계 최초의 증권거래소 / 로데베이크 페트람 지음, 조진서 옮김 / 이콘

역사에는 아무런 필연도 없다. 늘 우발적으로 몇 가지 만남이 우연히 겹치면서 사람의 의도와 상관없이 사태가 벌어지고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지금 견고해 보이는 모든 것도 어느 날 갑자기 붕괴 되어 흔적도 없이 공중으로 사라져 버린다. 순간적으로 출현하는 것과 덧없이 소멸하는 것과 당분간 지속될 것 사이를 오락가락하는 것이 역사일 뿐, 여기에는 어떠한 종류의 합법성도 들이댈 수 없다. ‘세계 최초의 증권거래소’는 역사의 이러한 우발성을 선명히 보여준다.

암스테르담은 평범한 중세 도시의 하나였다. 일찍이 상업이 발달해서 약간 규모가 크고 온갖 상거래에 익숙했을 뿐이다. 나머지는 똑같았다. “밤이 되면 호롱불 몇 개만 빼고 도시 전체가 암흑에 빠졌다. 강둑에는 하루가 멀다 하고 사형수들의 몸뚱이가 대롱대롱 걸렸다. 중세의 도시들은 우울했다.” 게다가 신생 국가 네덜란드 공화국은 스페인과 독립 전쟁을 한창 치르는 중이었다. 동양으로 배를 보내서 값비싼 향신료, 자기 등을 싣고 돌아와 장사하는 일이 주 수입원이었지만 포르투갈과의 적대 관계로 앞날을 내다보기 힘든 상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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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2년 네덜란드 의회는 “상인들이 서로 싸우지 말고 힘을 모아야 경제가 튼튼해지고 포르투갈을 상대로 해상 전투를 치를 때를 대비해서라도 회사를 통합하는 게 낫다”고 판단해 새로운 형태의 회사 설립에 돌입한다. 여러 회사를 설득해서 하나의 거대한 회사를 만들고 거기에 동방 무역에 대한 독점권을 부여한 후 전 국민을 상대로 자금을 모으려 한 것이다. 이로부터 세계사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 거대 공기업 네덜란드 동인도회사가 탄생했다.

이전에 동방무역에 종사한 회사들은 대개 3년 내외의 ‘프로젝트 파이낸싱’ 회사(프리컴퍼니)였다. 여러 사람이 돈을 모아서 배를 사고 선원을 고용해서 한 차례 동방 무역을 행하고 나면, 일단 배를 팔고 회사를 청산한 후 투자자 수익을 배분하는 식이었다. 동인도회사는 프리컴퍼니와는 여러모로 성격이 달랐다.

무엇보다 서너 해 정도의 단기투자가 아니라 무려 스물한 해 동안 권리가 지속되는 장기투자를 위한 회사였다(이 권리는 연장에 연장을 거듭해서 200년가량 계속된다). “외적을 물리치고 나라를 지키자”라는, 동방 거점 확보를 통해서 국가 경제의 장기적, 안정적 기반을 마련하려는 공적 의지가 있었기에 가능한 조처였다. 이에 따라 많은 국민의 참여를 유도하려고 정관에 “이 나라에 사는 사람들은 누구나 이 회사의 주식을 살 수 있다”는 구절이 삽입된다. 피로써 독립한 신생 국가라면 ‘애국’은 무조건 마케팅이 된다. 게다가 동방 무역이 연신 대박을 터뜨리는 상황에서 독점으로 인한 커다란 이익도 기대할 수 있었다. 당연히 사람들 반응은 뜨거웠다. 자본금 공개 모집을 끝낸 결과, 650만 길더, 요즘 돈으로 환산하면 1억 유로에 해당하는 자금이 순식간에 모였다.

그런데 문제가 살짝 있었다. 투자 회수 기간이 너무 길어 보였던 것이다. 설립 후 10년째에야 회사 경영 상태를 공개한 후, 투자자가 원하지 않으면 자금을 빼낼 수 있도록 되어 있었다. 투자 부진을 우려한 의회는 구절 하나를 슬쩍 추가한다. “(주주는) 이 사무소의 회계 담당자를 통해 (자신의 지분을) 타인에게 이전 혹은 양도할 수 있다.” 세계 최초로 지분 자체를 사고파는 일에 법적 정당성을 부여한 것이다. 이 한 줄로 인해, 우발적으로, 돈으로 돈을 사는 또 다른 방식(은행업이나 대부업이 아닌)이 갑자기 역사에 등장하고, 투자 열풍이 불면서 네덜란드 전역이 뜨겁게 달아오른다.

돈거래에는 사람들 피를 끓게 하는 어떤 요소가 있는 게 틀림없다. 순식간에 사람들은 주식에 주의를 온통 빼앗긴다. “어딜 뛰어가면 주식 때문이었다. 가만히 서 있어도 그 역시 주식 때문이었고, 어딘가 쳐다보면 주식을 보는 거였다. 공부를 하면 주식에 대한 공부였고, 항상 주식에 대한 환상을 꿈꿨다.” 대박이라는 환상 말이다. 대박은 법망을 피하는 사기나 투기를 낳고 투기는 거품을 낳고 거품은 위기를 낳고 위기는 법을 낳는다. 그리고 또다시 순환이 시작된다. 최초의 주식거래가 시작된 지, 단 100년도 지나지 않아 암스테르담에서는 선물, 옵션, 공매도, 브로커 등 주식을 둘러싼 모든 가능성이 시험되고 발전한다. 돈에 관한 한 인간의 창조성은 정말 놀랍다. 사소한 가능성조차 놓치지 않는다.

책은 사건이 느린 속도로 전개되는 소설을 읽는 듯하다. 어떠한 교훈도 없다. 거리를 두고 사태의 전개를 냉정하게 기술할 뿐이다. 사회 내 소수자였던 유대인을 통해 주식 자본주의가 영국과 프랑스로 확산되어 똑같은 주기를 반복하는 장면은 신비롭다. 다른 지역에서 진행되던 자본주의들이 서서히 힘을 잃고, 한 회사의 지분을 불특정 다수가 마음대로 사고파는 특이한 거래방식이 세계 경제의 중심에 들어앉는 이 과정은, 현대 자본주의의 기원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또 다른 경제의 존재 가능성을 꾸준히 상기시킨다. 우발적으로 나타난 것은 우발적으로 대체될 수 있으니까 말이다. 자본주의 경제를 들여다보고 싶을 때 참고삼을 만한 책이 또 하나 생겼다.

장은수 출판평론가·순천향대 초빙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