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반기문의 ‘배후’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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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식 / 논설주간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은 평생 국내 정치에 발을 들여놓은 적이 없고, 10년 가까이 국내에 있지도 않았다. 이런 사실을 고려하면 최근의 반기문 바람은 4년 전 ‘안철수 현상’보다 훨씬 희한한 일이다. 그럼에도 국민과 정치권은 기정사실처럼 받아들인다. 무엇이 반풍(潘風)을 일으키는 힘인가.

총장 부임 직전까지 오랜 기간 반 총장을 가까이서 지켜봐 온 필자는 지난 25일 관훈클럽 간담회에서 10년 만에 대면(對面)했는데, 적잖은 변화를 발견할 수 있었다. 우선, 건강을 과시했다. 1944년생이니 72세지만 특별한 운동을 하지도, 보양식을 찾지도 않는다. 터키 이스탄불에서 10시간 가까이 비행해 제주 공항에 내린 뒤 곧바로 간담회장으로 왔지만 1시간 반 동안 진행된 간담회 내내 목소리는 활력을 유지했고, 쏟아지는 민감한 질문에도 집중력이 떨어지지 않았다. 악수에도 힘이 들어가 있었다. “지난 10년간 마라톤을 100m 뛰듯 뛰었다. 초등학교 때부터 아파서 결석하거나 쉰 적이 없다”는 말이 허풍 같지는 않았다. 이런 과시는 과거의 그에게선 볼 수 없었던 일이다.

둘째, “창피할 때도 있었다” “말도 안 되는 얘기” “화가 나서 열변을 토했다”는 등 비(非)외교적 표현과 소신 피력을 서슴지 않았다. 총장 업무는 ‘외교’가 아니라 세계에서 가장 험난한 ‘정치’임을 강조했다. 셋째, 소명 의식을 앞세웠다. 묻지도 않았는데 남북통일, 그에 앞선 국내 대통합을 강조했다. “세계의 많은 정치인이 대통령에 당선되면 군림(‘above people’로 표현)하려 하고, 포용적 대화를 않는 것이 문제”라며 지도자의 불통을 비판했다. 넷째, 국내 정치 질문을 ‘즐겼다’. 간담회에서 정치 얘기는 않는다는 사전 양해에 따라 언론인들이 조심스러워했는데, 막상 국내 정치 질문의 봇물이 터지자 제지는커녕 모든 질문을 경청하고 메모했다. 과거에 기자들과 만나면 답변은 ‘기름 장어’같이 빠져나가고, 역으로 언론 관심사를 기자에게서 취재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번에도 그런 느낌을 받았다.

이 정도면 외교관에서 정치인으로의 변신을 결심했다고 보기에 무리가 없다. 그러나 반 총장의 이런 의지만으로 바람이 일어나지는 않는다. 정작 중요한 발원지는 따로 있다. 취약한 정치권과 심각한 정치 불신이다. 차기 대통령 후보군(群)이 강력하면 반 총장은 절대 움직일 사람이 아니다.

‘시대정신’도 반 총장에게는 순풍이다. 반 총장은 세계 차원의 냉전을 끝낸 미국의 ‘아버지 부시 대통령(조지 H W 부시)’을 떠올리게 한다. 그는 로널드 레이건의 대통령 연임에 이어 ‘보수 3기 집권’에 성공했다. 그리고 레이건의 봉쇄 정책 결과로 그의 재임 중 동유럽과 소련이 붕괴됐다. 하원의원을 4년 지내기는 했지만 유엔 대사, 중국 연락사무소장, 중앙정보국(CIA) 국장 등 외교·안보 전문가에 속하는데, 이런 경력이 냉전 해체의 순조로운 진행에 큰 도움이 됐다. 한반도는 마지막 냉전 지대다. 이명박·박근혜 2개의 보수 정권을 거치며 햇볕정책에서 대북 원칙 대응으로 바뀌었고, 중대한 변화가 임박했다. 제3기 보수정권 성공 여부, 남북통일 등의 측면에서 부시가 처했던 상황의 축소판이라 할 수 있다.

또 하나의 시대정신인 ‘통합’과 관련해서도 반 총장은 장점을 갖고 있다. 박 대통령의 임기 말로 갈수록 ‘정치의 히딩크’ 요구는 증가할 것이다. 반 총장은 여당 내 파벌이나 여야 경계와 자유롭고, 영·호남이 아닌 충청 출신이다. 거스 히딩크 같은 축구 감독과 달리 정치인은 ‘수입’할 수 없으니 외국 생활과 외교를 오래 한 사람이 유리하다.

이런 흐름과 본인 의지가 결합하면서 반풍에 돛을 단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정치는 현실이다. 각론으로 들어가면 부정적 요인이 더 많다. 친박과 충청 지지를 받으면서 동시에 극복해야 하는 상황부터 모순이다. 또 총장 임기 말까지 7개월 동안 국내 정치에서 ‘잠수’를 타지 않을 수 없다. 결국 반 총장의 정치적 운명은 자신보다 국내 정치권에 달렸으니 아직 상수(常數)라고 하기는 어렵다. 국내 정치가 국민 신뢰를 얻게 된다면 반기문 현상은 거품처럼 꺼질 것이다. 대선 1년 반 전의 여론지지도 1위가 신기루일 수 있음은 여러 차례 확인됐다. 여야 지도자들이 반기문 현상에 일희일비하기보다 ‘좋은 정치’에 집중해야 하는 이유다. 지금 반기문을 키우는 것은 팔 할이 그들의 ‘못난 정치’다.

문화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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