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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으려 애를 쓸수록 오히려 선명하게 떠오르는 기억은 대부분 삶의 결정적 순간과 관련되어 있다. 이러한 기억의 아이러니를 차용한 tvN 금토드라마 ‘기억’은 알츠하이머병을 선고받은 변호사가 인생의 의미를 깨달아가는 가족드라마다. 태선로펌 승률 최상위의 파트너 변호사 박태석(이성민)은 알츠하이머병 초기라는 진단을 받고 기억과 망각의 경계를 위태롭게 넘나든다. 그는 기억해야 할 것들이 지워지는 반면, 기억하고 싶지 않았던 것들이 마음으로 기억되어 괴로워한다.

박태석은 처음부터 잘나가는 변호사가 아니었다. 지방대 출신에다가 사법연수원 성적도 그리 좋지는 않았다. 대학선배가 운영하는 변호사 사무실에 출근해 국선변호도 맡으면서 나름대로 정의로운 변호사가 되기 위해 고군분투했던 시절도 있었다. 하지만 힘의 논리에 진실이 묻히고 정의가 사라지는 현장을 목격하고, 하나뿐인 아들마저 뺑소니 교통사고로 잃으면서 불평등과 불합리가 일상이 되어버린 세상에 절망했다. 이처럼 그에게 아들의 죽음은 잊고 싶은, 지워버리고 싶은 불행이었다.

절망과 불행의 순간에 뜻밖에도 태선로펌의 대표 이찬무(전노민)가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이찬무가 박태석에게 손을 내민 것은 로스쿨 재학생이자 태선로펌의 후계자인 이승호(여회현)가 방황하던 시절에 저지른 뺑소니 교통사고의 진상을 은폐하고 왜곡한 것에 대한 보상 차원이었다. 박태석의 아들 동우를 뺑소니 교통사고로 죽인 것이 바로 이승호였던 것이다. 하지만 박태석은 이유도 모른 채, 진실을 말하고 정의를 되살리기 위해 힘을 길러 권력자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이찬무의 손을 잡았다. 제법 성공한 인생이라고 자부했던 박태석은 알츠하이머병 초기 진단 이후 자신의 지나온 삶을 돌아보면서 뺑소니 교통사고의 진실과 마주하기 시작한다.

이 드라마가 흥미로운 것은 표면적으로 전개되는 사건의 이면에 우리 사회의 병폐와 치부를 배치한 서사 전략 때문이다. 표면적인 사건은 뺑소니 교통사고로 죽은 아들을 가슴에 묻은 아버지 박태석과 로스쿨에 다니는 아들의 미래를 위해 뺑소니 교통사고의 진상을 숨기려는 아버지 이찬무의 대립이다. 하지만 그 이면에 박태석의 아들 정우가 학교 폭력의 당사자로 지목되어 누명을 쓸 뻔 했던 일이나, 위자료를 줄이기 위해 사건을 조작하는 재벌가의 행태 등을 배치하여 개인적 일탈이 우리 사회의 구조적 폐해와 맞물려 있음을 보여준다.

진실이 밝혀질까 싶어 전전긍긍하는 이찬무와 이승호를 대신해 태선로펌의 실질적인 지배자인 이찬무의 어머니가 뺑소니 교통사고의 결정적 증인을 자살로 위장시켜 살해하도록 지시하는 극적 상황은 섬뜩하기까지 하다. 이찬무의 어머니는 정황 파악을 위해 찾아온 아들에게 대를 위해 소를 희생시킬 수밖에 없었다고 말한다. 아울러 이 모든 것이 선의에서 비롯한 것임을 강조한다. 선한 것은 중요하고 가치 있으며 귀한 것이지만, 판단을 흐리게 만든다는 그녀의 말은 두렵고 무서울 정도로 냉정하다.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해 타인의 생명을 희생양으로 삼는 기득권의 논리를 반박하기 어렵다는 것이 공포에 가깝다.

알츠하이머병은 고통과 세상과의 단절을 의미한다. 하지만 이 드라마는 오히려 우리가 기대했던 삶이 무너졌을 때 비로소 진정한 삶을 찾는 희망의 기적을 보여준다. 그리고 무한경쟁의 신자유주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잃어버린 것이 무엇인지, 그것을 되찾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유난히 척박하고 황량한 이 시대를 힘겹게 살아가는 중년의 가장들과 우리 사회의 소외된 이웃들에게 따뜻한 위로의 말을 건네는 드라마가 있어 위안이 된다.

충남대 교수·드라마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