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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식 / 논설주간

최근 집권 세력의 모습은 자포자기도 넘어 ‘정치적 자살’ 수준이다. 정치든 전쟁이든 승패는 상사(常事)다. 부득이 패했으면 최선을 다해 퇴각한 뒤 반격을 노려야 한다. 2보 전진을 위한 1보 후퇴도 있다. 그래서 후퇴도 작전이다. 지금 새누리당에는 최소한의 후퇴 작전조차 없다. 지휘부는 무너졌고, 장수들은 꽁무니를 뺀 상태다. 패잔병들은 오합지졸 신세다. 전쟁이라면 전멸을 면하기 어렵다. 이런 상황을 자초하고 있으니 자살 아니고는 설명하기 어렵다.

세 차례의 헌정 중단 사태가 있었지만, 보수 정당은 조국의 보루를 자임하며 무한책임을 회피하지 않았다. 건국 시기의 자유당이 1세대라면, 4·19와 5·16을 거쳐 2세대인 민주공화당으로, 다시 10·26 이후에는 3세대인 민주정의당으로 이어졌고, 민주화 이후엔 일부 민주세력과 합쳐 4세대의 민주자유당으로 변신했다. 그 뒤 신한국당, 한나라당, 새누리당으로 간판을 바꿨다. ‘반(反)민주’ 손가락질에도 일관되게 묵묵히 최선을 다해왔다. 재벌 4세 중에 기업가 자질은 고사하고 인성조차 형편없는 경우가 있다. 그런데 지금 ‘보수 4세’ 새누리당이 그렇다. 정권 재창출은 고사하고 면면히 이어온 보수 정치에 대한 배신이다.

패인을 제대로 따져 철저히 청산해야 한다. 참패의 근원에는 박근혜 대통령의 불통·독선이 있다. ‘배신의 정치’ ‘진실한 사람’을 강조해 친박 완장 세력을 등장시켰고, 막장 공천 파동의 배경이 됐다. 다음으로는 김무성 대표의 정치력이다. 당·청 관계 설정에 실패했다. 완전국민경선제 전면 도입이나 험지 출마론은 그 장단점을 떠나 비현실적이었고, 안대희 등 유능한 신인의 진입을 방해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실제 공천에서는 그나마 뒤죽박죽되고 말았다.

이런 일들이 정치적 책임의 영역이라면 참패의 직접적·실질적 책임은 ‘친박의 준동’에 있다. 친박이 내세운 이한구 공천관리위원장은 공정성이나 합리성은 고사하고 최소한의 품격조차 찾기 어려웠다. 당 대표를 향해 “바보”라고 막말을 하고, 정장 차림으로 국민 앞에 서는 예의도 보이지 않았다. 야당은 ‘국민 눈 밖에 난 사람’을, 여당은 ‘대통령 눈 밖에 난 사람’을 쳐내려 한 것이 민심의 분기점이었다. 게다가 비례대표 공천은 당 대표조차 “아는 사람이 없더라”고 할 정도로 한심했다. 박 대통령 존영 소동은 막장극의 하이라이트였다.

따라서 패인 청산의 첫 단추는 친박의 폐문(閉門)이다. 그런데 최경환 의원은 칩거하다 나타나더니 “네 탓이다 내 탓이다 할 상황은 아니다. 모두가 죄인”이라고 했다. 모두의 책임은 누구의 책임도 아니라는 의미도 된다. 이렇게 두루뭉수리 넘어가서 될 상황이 아니다. 친박부터 ‘내 책임’을 인정해야 한다. 박 대통령을 진정으로 위하는 ‘진박’이라면 솔로몬 재판의 ‘진모(眞母)’처럼 살신성인(殺身成仁)을 자청하는 게 옳다. 계파 청산의 진정성을 보이려면 좌장 격인 서청원·최경환 의원 중 1명, 또는 모두 정치에서 물러나는 고육책이 필요하다. 이런 조치 없는 총선 백서는 무의미하다.

박 대통령은 읍참마속(泣斬馬謖)의 심정으로 청와대 참모들의 책임부터 묻고 이제부터라도 ‘열린 리더십’을 보여야 한다. 콘크리트 지지층도, 국정 지지율도 예전 같지 않다. 여의도 정치 탓 대신 자신의 정치력 부족을 반성하지 않으면 국정을 이끌기 더 어려울 것이다. 새누리당은 내년 대선을 의식하지 말고 오직 국민에게 감동을 줄 수 있는 정치에 집중해야 한다. 야당이 외쳐 왔던 육참골단(肉斬骨斷)이 필요하다. 백가쟁명의 내부 투쟁과 과감한 정풍이 일어나야 한다. 영국 보수당은 43세의 데이비드 캐머런을 앞세워 집권에 성공했고, 우리나라에서도 40여 년 전 양김은 구상유취(口尙乳臭) 조롱에도 40대 기수론을 관철했다.

마침 정치권에 근본적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다. 강봉균·김종인·이상돈 세 사람이 보여주듯 여야 경계조차 모호해졌다. ‘운동권’은 훈장 아닌 낙인처럼 됐다. 3김이나 박 대통령 같은 스타 정치인은 출현하기 어렵다. 지역주의는 완화되고 있다. ‘포스트 민주화’라는 시대적 변화가 시작됐다. 그 1차전에서 새누리당은 정당의 자살 수준으로 참패했다. 제대로 다시 세우지 못하면 박 대통령부터 ‘아버지가 만든 조국 근대화 정당’을 망쳤다는 책임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