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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재선 / 문화부장

원로 작가 한승원(77) 씨는 수년 전 언론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전생에 지은 업이 많아서 자식들에게까지 글 쓰는 일을 대물림하는 것 같아요.” 아들(동림·48)과 딸(강·46)이 자신의 뒤를 이어 문학을 업으로 삼은 것에 대한 소회였다. 그때 그는 딸 한강 씨가 ‘문학 한류(韓流)’의 한 희망이 될 것을 예견했을까. 한강 씨의 소설 ‘채식주의자’가 맨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 최종 후보에 올랐다는 소식을 듣고 어떤 생각을 했을까.

알려진 것처럼, 맨부커상(Man Booker Prize)은 노벨문학상, 프랑스 공쿠르상과 함께 세계 3대 문학상으로 불린다. 영국 등 영연방 국가 작가를 대상으로 하는 맨부커상과 비(非)영연방 작가·번역가에게 수여되는 맨부커 인터내셔널(International Prize) 부문으로 나뉜다. 올해 인터내셔널 부문 최종 후보 6명엔 터키의 노벨문학상 수상자 오르한 파무크, 중국의 대표 소설가 옌렌커(閻連科) 등 국제적 작가들이 포함됐다. 여기에 한국 작가 작품이 들어간 것은, 처음 있는 문학적 사건이다.

근년에 노벨상 시즌 때마다 한국의 한 시인이 문학상 후보로 거론돼왔으나, 이는 추정에 의한 것일 뿐이다. 후보가 공표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에 비하면, 맨부커상 후보는 투명하게 공개된다. 한강 씨가 최종 후보에 포함된 것은, 한국 작가의 작품이 세계적 문학인들의 그것과 어깨를 겨룰 수 있다는 분명한 증거가 되는 것이다.

최근 우리 작가의 작품이 세계 각국에 번역돼 현지의 높은 관심을 받는다는 언론 보도가 빈번해졌다. 지난달 열렸던 ‘2016 파리 도서전’에서도 한국 작가들에 대한 관심이 뜨거웠다고 한다. 이로써 대중문화에서처럼 문학에도 한류 바람이 불 수 있다는 기대가 높아졌다.

그러나 문학 한류는 이제 희망의 싹이 움트고 있을 뿐이다. 세계 각국에 우리 문학이 점점 많이 소개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전반적으론 미미한 수준이다. 이제 겨우 알려지고 있다고 보는 게 정확하다. 한국 문학 작품이 해외에서 주목을 받을 때마다 우리 언론이 들썩이는 것은 그 역설적 증거다.

한국 문학의 세계화를 논하는 자리에서 언제나 우선적 과제로 언급되는 것은 좋은 번역가가 많아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한강 씨의 작품을 영어로 옮긴 영국 여성 데버러 스미스가 한국 문학 번역자가 된 계기를 살피면 의미심장하다. 그는 한국 문학 번역자가 영국에 없다는 사실을 알고 21세에 한국어 공부를 시작했고, 28세에 맨부커상 후보에 오르는 성과를 이뤄냈다. 그는 한강 씨의 작품을 영어로 옮기며 원작의 예술성을 최대한 살려냈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를 통해 우리가 새삼 알 수 있는 것은, 영미권에서 한국 문학은 겨우 번역되기 시작했다는 것. 그리고 원어와 한국 문학에 함께 정통한 원어민 번역자가 필요하다는 것. 그런 점에서 한국문학번역원에서 원어민 번역가를 양성하는 아카데미 과정을 강화한 것은 바람직하다. 문학 한류의 싹을 키우기 위해선 번역과 해외 출판에 대한 지원을 꾸준히 늘려가야 한다. 문학에 대한 인위적 지원이 가당치 않다는 일각의 지적은, 현실을 제대로 보지 않는 가탈일 뿐이다.

물론 외국 출판사들이 우리 작품을 스스로 찾아서 번역하고 출간해 자국 시장에 내놓는 게 가장 바람직하다. 그 단계로 가기 전까지는 희망의 싹에 물을 주는 것과 같은 지원이 필요할 수밖에 없다. 정부와 관련 기관뿐만 아니라 뜻있는 기업의 후원도 절실하다. 포스코가 한·영 문화잡지 ‘아시아’를 후원하는 것은 한 모델이다. 이 잡지를 펴내는 ‘도서출판 아시아’는 최근 젊은 한국 작가들의 작품을 영어로 옮기는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기업의 문화 후원이 출판계의 뜻있는 작업을 2차적으로 촉발한 사례다.

해외에 우리 작품을 많이 소개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한국인이 한국 문학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런 바탕이 없는 문학 한류는 사상누각이다. 미국 문예지 ‘뉴요커(The New Yorker)’는 지난 2월 “한국인들은 책은 읽지 않으면서 노벨문학상을 원한다”고 비판하는 내용의 기사를 실었다. 부끄러운 현실을 제대로 지적한 것이니, 우리는 화를 내기보다 아파해야 한다. 스스로를 돌아보며 절실히 새겨야 한다. 책을 읽는 국민이라야 문학 한류를 기대할 자격이 있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