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크게보기

김병직 / 편집국 부국장

18세기 말 프랑스대혁명으로 정권을 잡은 로베스피에르. 그는 너무 비싼 우유값이 파리 시민들을 고통에 빠뜨린다고 보고 우유값을 절반으로 낮추라고 포고령을 내린다. 그런데 우유 생산량 급감으로 우유값이 배로 폭등하자 젖소 사료값을 절반으로 내리도록 또 다른 명령을 내렸다. 그러자 이번엔 사료생산을 중단하는 일이 속출하면서 사료값이 폭등했고, 우유값은 혁명 전의 4배로 치솟았다. 시민들을 위한다며 ‘선의(善意)’로 시행했던 이런 정책들이 반대로 시민들의 고통을 가중시키면서 로베스피에르는 결국 분노한 시민들 손에 끌어 내려져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다. 허망한 포퓰리즘 정책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로베스피에르의 우유값’ 이야기를 새삼 떠올리는 건 ‘선의’로 포장된 제2, 제3의 우유값 정책이 2015년 12월 말 우리 사회 곳곳에서 목도되기 때문이다.

서비스업법·원샷법 등 경제활성화법과 노동개혁법안의 국회 통과를 결사 저지하고 있는 새정치민주연합이 지난 22일 각종 민생정책을 쏟아냈다. 그 내용을 보면 자영업자의 영업권을 보장하기 위해 현행 ‘상가건물 임대차보호법’에서 5년인 계약갱신청구권을 10년으로 늘리고 재건축을 할 경우 기존 임차인에 우선임차권을 제공토록 하자는 것이다. 또 가맹본부와 가맹점주 간의 불공정 거래를 막기 위한 ‘이익공유제 법제화’를 제안했다. 하도급법 등에만 적용되는 ‘징벌적 손해배상 제도’를 가맹점과 중소유통업, 납품업자 등 다른 자영업으로 확대하는 방안도 제시했다. 이 같은 정책은 약자와 서민을 위하고, 갑(甲)의 횡포에 맞서 을(乙)을 대변한다는 정의로운 취지를 내세우지만 그 결과는 정반대인 경우가 많다.

건물 세입자가 권리금 떼이는 일을 없애겠다며 지난 5월 입법화된 ‘권리금 보호법(상가건물 임대차보호법)’부터 따져보자. 이 법은 건물주가 계약 만료 3개월 전부터 임차인이 후속 임차인과 권리금을 주고받는 것을 방해하지 못하도록 했고, 만약 방해하면 세입자가 손해배상을 제기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다. 그러자 최근 임대기간 만료일이 임박한 서울과 수도권 인기 상가에서는 임대료와 보증금이 급등하거나 퇴거를 요구하는 사례가 속출하고 있다. 권리금 소송 부담과 ‘3개월 규정’을 피하기 위해 계약만료 5∼6개월 전부터 세입자에게 퇴거를 요구하거나 임차인이 후속 임차인을 구하지 못하게 임대료를 급등시키는 전략을 쓰는 건물주가 늘고 있기 때문이다. 임대·임차 상거래 관행까지도 갑-을 관계로 규정해 을(세입자)을 위한다고 도입한 대책이 오히려 세입자들의 고통을 키운 셈이다.

유통 본사의 부당한 횡포로부터 대리점을 보호한다는 취지로 지난 2일 국회를 통과한 ‘대리점거래 공정화법’(일명 남양유업 방지법) 역시 그 결과는 대리점업계의 큰 피해로 돌아갈 가능성이 크다. 각종 까다로운 대리점 보호 규정과 함께 불공정 거래 시 본사가 최대 3배 징벌적 배상토록 하는 내용까지 포함시켜 놓으니까, 이에 부담을 느낀 유통 본사가 아예 대리점 운영을 줄이고 직영점으로 전환할 움직임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아파트 경비원을 최저임금 적용 대상에 포함시킨 뒤 전국 아파트 경비원 일자리가 4만여 개나 급감한 사례도 선한 의도가 선한 결과를 가져오지 않는다는 점을 잘 보여준다.

자신들만 ‘약자의 대변자’라도 되는 양 ‘정의의 사도’를 자처하고 나서는 움직임이 4월 총선을 앞두고 갈수록 노골화하고 있다. 정부가 최근 ‘2016년 경제정책 운용방향’을 발표한 뒤 새누리당이 내놓은 첫 요구는 “어려움을 겪는 중산·서민층 지원을 위해 추가적인 대책을 마련하라”는 것이었다. 표심(票心) 공략을 위한 여야 간 포퓰리즘 경쟁의 광풍이 또 한 차례 휘몰아칠 태세다. 한국경제 회생을 위해 절실한 노동개혁법과 경제활성화법은 무능함과 정파적 이해관계에 막혀 표류시키면서 그 빈자리를 사탕발림 포퓰리즘 법안으로 채우는 건 아닌지 걱정이다. ‘지옥으로 가는 길은 선의로 포장되어 있다’는 말이 있다. 아무리 취지가 좋더라도 그 선택에는 반드시 대가가 따른다. 영국의 과학철학자 칼 포퍼는 “지상을 천국으로 만들려는 노력이 지옥을 만들 수 있다”고 갈파했다. 아무런 대가 없이 천국을 만들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바보’ 아니면 ‘사기꾼(선동가)’이다. 과연, 누가 사기꾼이고 선동가인지 가리고 심판하는 건 국민들의 몫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