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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회평 / 논설위원

노동법 파동은 임기 초반 승승장구했던 김영삼(YS) 정권이 기울게 된 결정적 사건이었다. 당시 여당이던 신한국당은 1996년 12월 26일 단독으로 노동관계법·안기부법 개정안 등 11개 법안을 기습 처리했다. 성탄절 여운이 채 가시지 않던 새벽 6시에 전광석화처럼 해치운 작전이었다. 역풍은 거셌다. 한국노총·민주노총이 즉각 전국 규모의 총파업을 벌였고, 민심도 돌아섰다. YS는 이듬해 1월 21일 김대중 국민회의 총재, 김종필 자민련 총재와 ‘3김’ 영수회담을 갖고 노동법 재개정 입장을 밝히게 된다. 들끓는 여론에 항복한 것이다. 노동법은 결국 3월 10일 ‘12·26 법안’이 일괄 폐지되고 새 법안으로 대체됐다. 이런 굴욕 이미지와 겹치면서 YS판 노동개혁은 ‘실패’라는 딱지가 붙었다. 과연 YS는 쓸데없는 일을 벌인 것일까.

1996년 4월 YS는 ‘신 노사관계 구상’을 발표하면서 노동개혁에 불을 지폈다. 지금의 노사정위원회 격인 대통령 직속 노사관계개혁위(위원장 현승종)가 출범해 6개월간 논의했으나 단일안 마련에 실패했고, 결국 정부가 공익위원 안을 바탕으로 개정안을 만들었다. 정부안은 일부 단서·유예가 붙긴 했지만 노조 정치활동 금지, 복수노조 금지, 제삼자 개입금지 등 ‘3금’ 조항을 삭제하되 정리해고제, 변형(탄력)근로제, 근로자 파견제 등 ‘3제’를 허용하는 것으로 요약된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국답게 노동권을 확대하면서 기업활동의 숨통을 터주는 내용이어서 노·사 간 균형도 얼추 맞았다. 하지만 노동계 내부에서 ‘정리해고’에 대한 정서적 반발이 적지 않았고, 야당도 반대했다. 이런 와중에 신한국당이 재계 불만을 무마하고 자민련 협조를 구하려고 상급단체의 복수노조, 즉 민주노총의 합법화를 수용한 정부안을 ‘3년 유예’로 수정한 것이 결정타였다. 여기에 ‘날치기’라는 절차의 비정상이 개혁 취지를 덮어버린 것이다.

3·10 재개정법은 상급단체의 복수노조를 즉각 허용했고, 거꾸로 정리해고제를 2년 유예했다. 노동법 반대를 주도했던 김대중 총재는 집권 직후 국제통화기금(IMF)의 강력한 압박에 다시 정리해고를 받아들이는 처지가 된다. 반전에 반전을 거듭한 노동법 드라마다. 돌이켜보면 YS 노동개혁안 그 자체는 지금 기준에서도 괜찮은 작품이었다.

20년 가까이 흐른 지금 비슷한 일이 반복되고 있다. 새누리당이 발의한 사실상의 정부안인 노동 관련 5개 법이 국회 심판대에 올라있다. ‘9·15 노사정 합의’가 있었지만, 비정규직 문제 등 후속 합의가 불발되면서 노·사·정, 공익위원 각각의 의견이 국회에 제출됐다. 단일안 마련에 실패한 것이다. 5개 법안 중 비정규직과 연관된 기간제법·파견법 개정안을 두고는 야당이 극력 반대하고 있다. 법안 처리의 키를 쥐고 있는 국회 환경노동위의 여야 의원이 동수인 것도, 위원장이 야당인 것도 1996년과 똑같다. 그때와 다른 것이 있다면 국회선진화법 때문에 원내 과반수 의석으로도 통과시키기 어렵다는 점이다. 노동시장 유연성 제고라는 노동개혁 취지로 볼 때 정부·여당의 개정안은 미흡하기 짝이 없다. 그래도 35세 이상 기간제 근로자에게 기존 2년에 더해 2년을 더 근무할 수 있도록 한 기간제법이나 고령자 등의 파견을 허용하는 파견법이 현장 근로자의 고용 불안을 다소 해소하고 고용 기회를 늘리는 것만은 분명하다. 정규직의 시각, 혹은 정규직 대 비정규직 구도로 재단할 일은 아니다. 하지만 그런 ‘박근혜 노동개혁’마저도 물 건너갈 처지에 놓인 것이다.

역대 정권은 글로벌 스탠더드에 맞는 노동시장 개혁을 시도했으나 번번이 강성노조 세력에 밀려 좌절했다. 노동변호사 출신 노무현 전 대통령도 예외는 아니다. “노조는 자기들 이익은 다 챙기고 자기들은 아무 노력도 희생도 보이지 않으면서 비정규직 문제, 최저임금 문제 들고 나와 정부를 공격합니다. 연대의식도 없이 노동운동 한다고들 합니다. 정부가 이런 식으로 무력하게 가서는….”(권재철, ‘대통령과 노동’) 2003년 9월 김금수 당시 노사정위원장에게 토로한 말이다. 노 전 대통령도 ‘노사관계 선진화 방안’을 추진했으나 민주노총은 사사건건 제동을 걸었다. 그때 민정수석으로 동석했던 문재인 새정치민주연합 대표는 지금 민주노총과 한목소리로 노동개혁 저지 선봉에 서 있다. 재집권을 바라는 야당 대표라면 정파를 넘어 좀 더 큰 그림을 그려야 하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