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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의 죄 / 베른하르트 슐링크 지음, 권상희 옮김 ／ 시공사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가 과거사 문제와 관련해 내세우는 자기 합리화 중 하나는 ‘세대론’이다. 전후에 태어난 세대가 인구의 8할이 넘는 상황에서 전쟁과 무관한 다음 세대에게 사죄의 숙명을 안길 수 없다고, 그러니 양국의 미래지향적 관계를 위해 빨리 화해하자는 것이다. 일본의 젊은 세대에게는 계속된 사죄 요구가 억울하다는 뜻을 드러내는 이 입장 앞에 우리는 충분히 또 제대로 사과받지 못했다는 억울함을 토해내지만, 이와는 별개로 ‘세대론’은 생각할 거리와 논점들을 제기한다. 선대의 잘못된 행동에 대해 후손이 언제까지 얼마만큼 책임져야 하는가, 시간과 함께 가해자와 피해자 모두 사라진 뒤엔 누가 누구에게 무엇을 어떻게 사죄해야 하는가.

영화 ‘더 리더’의 원작 ‘책 읽어주는 남자’(1995) ‘귀향’(2006) 등을 통해 나치의 과거사 문제, 이에 대한 죄의식 문제를 끈질기게 다뤄온 독일의 법조인이자 소설가 베른하르트 슐링크(71)는 이에 대해 명쾌하게 단언한다. 독일 과거사를 청산하기 위해 노력해온 대표적 전후 세대 지식인인 그는 책 ‘과거의 죄’에서 나치 정권에 의해 자행된 홀로코스트 같은 범죄는 수평적(한 세대 내에서)으로, 또 수직적(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으로 전가되는 ‘집단죄’로서 제국주의 식민지, 학살, 노예화 같은 집단죄는 특정 시기, 특정 국가의 사건을 넘어 보편적 역사가 되기에 세대를 아무리 거쳐도 자유로울 수 없다고 밝힌다. 지난해 박경리문학상 수상차 한국을 찾았을 때에도 그는 이렇게 말했다. “과거와 작별할 순 있지만 역사와의 작별은 없다.”

책은 저자가 20여 년간 나치와 홀로코스트, 또 슈타지(동독 국가보안부)의 인권유린 같은 구 동독 범죄 등 과거사를 왜 청산하고 용서를 구해야 하는지에 대한 논점, 이를 위한 자기 세대의 노력과 실패, 앞으로의 과제 등을 성찰해 쓴 글 8편을 묶었다. 국가의 죄를 떠안고 해결하려는 윤리의식, 여전히 생생하게 느끼는 죄의식, 다음 세대에는 질문이 아닌 답을 주어야 한다는 기성세대의 책임감, 무엇보다 왜 과거사를 떠안고 해결해야 하는가에 대한 논리를 층층이 쌓아가는 엄밀성이 놀랍다.

소설가이기 이전에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주 헌법재판소 재판관(1987∼2006)을 지내고 프랑크푸르트대, 훔볼트대에서 가르친 법학자답게 그는 국가나 정권에 의한 집단죄에 대한 정확한 정의에서 시작한다. 왜냐하면 법적으로는 오직 개인만이 자기 행위에 책임이 있고, 개인은 오직 자신의 행위에 대해서만 책임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구성원 몇 명의 죄 때문에 집단 전체가 유죄가 되는 집단죄는 법적 개념에 모순된다.

이에 저자는 집단죄의 법적 근거로 고대 게르만법을 가져온다. 고대 게르만법에선 한 부족 구성원이 다른 부족 구성원을 죽게 한 경우 이에 대해 책임지지 않으려면 범죄를 저지른 구성원을 추방해야 한다. 이것이 집단죄의 이성적 핵심이다. 범죄자와 혈연이나 민족 등으로 이어졌기에 집단죄가 되는 것이 아니라 한 집단이 범죄를 저지른 자에게 해명을 요구하지 않고 책임지우지 않고, 그와의 유대를 지속하는 경우 죄를 짓는 것이다. 따라서 ‘과거의 죄’는 나치 전범 처벌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나치 만행에 동참하거나 방조한 사람들, 반대하지 않음으로써 죄에 연루된 사람, 피해자를 돕지 않은 사람, 범죄를 저질렀다는 걸 알고도 그 사람과 연대를 유지한 사람들 모두 집단죄에 연루된다.

그렇다면 나치 범죄를 책임져야 할 독일인이 모두 사망하고 나면 독일은 과거에서 자유로워지는가. 2025년이 되면 1945년 이전에 일어난 일에 법적 책임을 져야 할 독일인이 없어진다. 몇몇 정치인들이 기뻐하며 내세우는 이 주장에 대해 슐링크는 그럴 수 없다며 또 다른 문제를 제기한다. “다음 세대에게 나치와 홀로코스트는 지난 과거이다. 법적 책임을 질 이유도, 관계 끊기를 해야 할 부모도 없다. 하지만 이들 역시 죄책감을 느끼며 트라우마를 안고 산다. 피해자의 손자 세대 역시 마찬가지다. 이는 일회성 과거에 그치지 않고 역사로 남기 때문이다.” 지난 과거가 너무 끔찍했기 때문만이 아니라 이 범죄가 관련된 국가, 민족들 모두의 역사가 되고, 끊임없이 영화·연극·문학 등을 통해 다뤄지면서 인류의 보편적 경험이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과거는 결코 청산될 수 없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그렇지만 그는 국가의 범죄, 과거사를 청산하는 방법 중 가장 아름다운 것으로 용서와 화해를 꼽았다. 다만 이 화해는 미래지향적 관계를 명목으로 지금의 상처조차 치유하지 못한 그런 화해일 순 없다. 이에 대한 저자의 의견은 매우 인상적이다. “3세대, 4세대에서 죄의 연루가 끝나면 범죄자들과 피해자의 후손들 사이에 긴장감이 사라진다. 그러나 세대가 지난 후에도 용서, 특히 식민주의적 압제, 착취, 노예화, 학살의 부당함에 대해서는 용서를 구해야 한다. 이때 누구도 범죄자를 대신해 용서를 구할 수 없고, 피해자만이 용서할 권리와 용서하지 않을 권리를 갖는다. 피해자가 용서하지 않는 것에 대해 범죄자 가족도, 후손도, 친구도 더군다나 정치가들이 용서를 구할 수는 없다. 그것은 월권행위다. 그리고 화해는 진실을 전제할 때 이뤄지는 것이다.” 2007년 출간된 책이지만 이 모든 논점들, 무엇보다 진실과 양심을 향한 지식인의 끈질긴 노력은 우리에게 여전히 유의미하다.

최현미 기자 chm@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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