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크게보기 1960년대 사무실 공간을 창조적으로 쓰는 액션 오피스가 등장했지만, 사무직의 지위를 보여주듯 여유 공간은 점점 줄어들었고 결국 칸막이만 남은 큐비클로 변하게 된다. 사진은 1978년 액션 오피스 Ⅱ의 모습. 이마 제공

큐브, 칸막이 사무실의 은밀한 역사 / 니킬 서발 지음, 김승진 옮김 / 이마

저녁이 어둑해지면 고층 빌딩 숲에서 쏟아져 나오는, 현대 도시의 표준적 대표 거주민인 사무직 노동자 그리고 이들이 하루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사무실. 한때 중산층으로 분류되기도 하고, 지식노동자로 기대를 모으기도 했지만 최근엔 ‘직장이 전쟁터라면, 그 밖은 지옥이야’라며 밀려나지 않으려 애쓰는 ‘미생’들로 전락한 사무직 노동자와 이들의 공간인 사무실은 어떻게 탄생했을까. 재기발랄한 미국 작가 니킬 서발의 책은 사무직 노동자와 사무실의 연대기를 전하는 지적이고 흥미로운 안내서이다. 사무직은 어떻게 탄생해 변화했고, 사무직의 변화에 따라 초고층빌딩부터 사무실 구조, 가구 디자인, 파일 캐비닛과 타자기 같은 사무용품까지 사무실의 모든 것은 어떻게 진화했는지 생생하게 보여준다. 미시사를 기본으로 노동경제학, 경영이론, 사회학, 문학, 영화, 건축, 디자인까지 다양한 분야를 아우르며 두 축의 역사를 세밀하게 추적한다.

“화이트칼라는 이 세상에 조용히 스며들어 왔다.” 사회학자 C 라이트 밀스의 표현대로 사무직 노동자는 소리 소문 없이 생겨났다. 19세기 중반, 영국과 미국에서 산업화가 진전돼 행정 업무가 많아지면 자연스럽게 장부·청구서·거래 원장 등 서류 작업을 담당하는 이들이 등장했다. 처음에 낯선 이들에 대한 사회적 시선은 그리 좋지 않았다. 이들에게선 농부나 공장 노동자가 보여주는, ‘노동’이나 ‘생산성’에 부합하는 것을 하나도 찾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 사무원은 문서를 베껴 적었고, 회계원은 숫자를 더해 더 많은 숫자를 만들었고, 보험원은 더 많은 서류를 만들었다. 당시 미국 잡지‘배너티 페어’는 사무원에 대해 이렇게 경멸했다. “허영심 많고 비열하며, 이기적이고, 욕심 많고, 교활하며 불만이 많고 소심한 사람들. 그리고 얼마 있지도 않은 기운을 진짜 노동을 하는 진짜 남자보다 옷을 더 잘 입는 데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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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사무원은 조용히 늘어나 몸집을 불렸고 결정적으로 육체 노동자와 구분되면서 일종의 계급이 됐다. 이들은 임금 수준도 육체 노동자보다 높았을 뿐 아니라 지급 방식도 달랐다. 육체노동은 시급으로 지급됐지만 사무직은 연봉을 받았다. 이는 육체노동자는 결코 누리지 못하는 경제적 안정을 사무직에게 안겼다. 이 시기에 사무직만의 독특한 직업관이 형성됐다는 것도 흥미롭다. 초창기 사무직은 주로 상업가에게 고용됐는데, 이들과 사무원의 관계는 끈끈한 남성적 유대가 특징이었다. 규모가 작은 만큼 사무실은 책상이 나란히 놓인 친밀하고 좁은 공간이었다. 이곳에서 사무원은 상사에게 보조 매니저, 오래 곁에 둔 하인, 믿을 만한 사람, 경영 훈련 중인 후계자 그리고 장래의 사윗감으로 여겨졌다. 사무원들 스스로도 자신을 나중에 상사가 될 사람으로, 훈련 중인 경영자라고 생각했다. 지금은 지루한 일을 하고 있지만 언젠간 상업가가 될 것이라고 믿었다. 따라서 공장 노동자들은 부당한 취급을 받을 경우 연대를 선택한 반면, 사무직들은 상사가 되기 위해 자신의 능력을 키우겠다는 ‘자기계발’을 직업윤리로 삼았다. 당시 능력 있는 사무원이 갖춰야 할 역량 중 하나는 비굴하다 싶을 만큼 아첨하면서 상사가 내 사람을 얻었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직장인의 ‘자기계발’ 욕구와 사내 정치의 탄생이 사무 노동자의 출발점과 같다는 것이 놀라울 뿐이다.

이렇게 출발한 사무직 노동자는 1860년에서 1920년 사이 비즈니스 규모가 커져 그 종류와 수가 크게 늘면서 빠르게 변하게 된다. 19세기 말 호황의 철도 회사를 필두로 업무가 여러 부서로 나뉘는 사업부제가 도입되고, 직원들을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위한 과학 경영이 발달하면서 사무원과 파트너가 다양한 업무를 같이 하던 시대에 종지부를 찍고 사무직의 전문화, 계층화 시대로 접어든다. 일이 분화되면서 지위에 따른 보상은 정교해졌고, 사무실도 지위 구분을 시각적으로 드러내기 시작했다.

이어 책은 미국 경제의 풍요로움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고층빌딩 건축붐을 거쳐 풍요로운 사무실의 정점 (당연히 사무직의 정점) 시절로 치닫는다. 1960~ 1970년대 사무직은 중산층으로 미래를 보장받고, 경영학자 피터 드러커 등에 의해 지식 노동자로 기대를 한몸에 받는다. 사무실은 깨끗하고 눈부신 조명. 개방형 사무 공간, 안락의자, 오토만 등으로 꾸며졌고, 자유로운 공간이야말로 창의적 인재를 만든다는 신념 아래 사무실을 자유롭고 개방적인 공간으로 꾸미는 액션 오피스가 등장했다. 하지만 너무 이상적이었던가. 액션 오피스는 너무 넓은 공간을 차지한 데다, 비용도 비쌌던 탓에 실제 현장에선 인기를 끌지 못했다. 개인의 공간을 중요시하면서도 협업이 가능케 했던 액션 오피스는 1990년대 말을 거치면서 칸막이로 구분한 큐비클(cubicle)의 탄생으로 이어진다.

이 같은 ‘큐비클’은 사무직 노동자의 현재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각각의 큐브에 갇힌 수동적 순응성과 특징 없는 익명성의 존재.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자율권’을 사무직 노동자의 길로 제시한다. 구글 등 개인의 자율성을 확대하려는 새로운 움직임, 개인의 자율성을 최대한 끌어올리는 프리랜서 등이 이 같은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이 역시 그리 장밋빛은 아니다. 농구장과 개인 트레드밀까지 갖춘 기발한 닷컴 사무실들이 생겨났지만 이 같은 유토피아적 건축물은 결국 개인들이 자발적으로 24시간 일하게 만들고, 많은 프리랜서가 사무실에서 벗어났지만 상당수가 재정적 불안, 부가 급부의 부재, 고립된 노동 환경에 허우적대고 있다. 간단히 말해 화이트칼라 이야기는 여전히 자유와 희망에 대한 약속이 계속해서 배신당하는 이야기라는 것이다.

그렇다 해도 ‘자율권’은 포기할 수 없는 방향이라고, 노동자가 노동 과정에 더 많은 자율권을 갖고 경영진의 통제나 위계는 줄어든 일터, 그것이 앞으로의 길이 될 것이라고 저자는 봤다. 다만 이 같은 자율성 확보의 여부는 노동자들의 몫이라고 했다. 사무직 노동자들은 스스로 큐비클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최현미 기자 chm@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