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 섹스 스캔들’ 정치 판단 마비시키는 최음제였다

이미지 크게보기 빌 클린턴(왼쪽) 전 대통령과 백악관 인턴 모니카 르윈스키(오른쪽)의 스캔들은 현직 대통령을 탄핵 위기로 몰고 간, 미국 역사상 최대 섹스 스캔들이었다. 문화일보 자료사진

섹스, 거짓말, 그리고 대통령 / 래리 플린트, 데이비드 아이젠바흐 지음 안병억 옮김 / 메디치

래리 플린트, 반평생 성인잡지 ‘허슬러’의 발행인으로 살아온 인물. 그런 사람이 책을 냈다. ‘허슬러’가 아닌 역사책. 공동 저자는 데이비드 아이젠바흐, 미국 컬럼비아대 정치사 교수다. 이렇게 색다른 조합을 이룬 두 저자는 여성의 몸을 극단적인 성 상품 이미지로 담는 잡지 못지않게 성에 대한 놀라운 이야기, 바로 미국 역대 대통령들과 그 주변 정치인들의 섹스 스캔들을 줄줄이 풀어낸다. 그것도 글 한 줄 한 줄 꼼꼼하게 출처를 밝혀가면서.

‘섹스, 거짓말, 그리고 대통령’은 먹고 사는 일만큼이나 자연스러운 행위인 ‘섹스’를 관음증적인 시선으로 들춰내서 대중에게 팔아먹는 성 상품이 아니다. ‘섹스’에 ‘거짓말’이 필요해지는 것은 비밀이 있다는 것이다. 그 비밀이 아찔하고 매혹적인 성적 매력을 불러일으키는 사랑의 묘약이 아니라 초강대국 미국의 최고지도자인 대통령이 권력을 차지하고, 행사하고, 유지하는 가운데 중요한 정치적 판단을 마비시키는 최음제가 되어 온 역사를 조목조목 짚어낸다.

그리고 그 비밀을 드러내거나, 퍼트리거나, 소비해온 언론의 역할, 거기에 반응해 들끓었던 대중들의 행태까지도.

저자들은 미국 건국의 아버지 벤자민 프랭클린부터 노예해방을 이끈 링컨 대통령, 역대 최장수 미연방수사국(FBI) 국장이었던 에드거 후버, 공안정국의 광풍을 일으켰던 조셉 매카시를 거쳐 백악관 인턴 여대생과의 스캔들로 망신살이 뻗쳤던 빌 클린턴에 이르기까지 미국 지도자들과 주변 인사들에 대해 풍문으로 돌았거나 비밀에 부쳐져 왔던 여러 사건의 진상을 속속들이 파헤친다. 독립전쟁과 남북전쟁, 국제연맹과 제2차 세계대전, 9·11 테러에 이르기까지 역사를 뒤흔든 사건들에 드리운 어마어마한 대통령들의 섹스와 거짓말들. 불륜, 동성애, 삼각관계, 비밀연애 등등.

지금까지의 미국사에서 알려져 왔던 지도자들에 관한 서사는 사실이 아니라 신화이며 허구라는 증거를 빽빽하게 들이민다. 하지만 지도자들의 사생활을 낱낱이 들추어내고, 도덕성 논란을 일으키는 것 또한 정치적으로 악용되어온 음험한 공작이라는 것도 경고한다. 정치인들의 사생활을 들춰내서 약점으로 쥐고 위협하거나, 스캔들로 확대 재생산시켜 유권자들의 관심을 돌리려는 정치인들과 언론이 얻고자 하는 것은 정의와 도덕의 실현이 아니라 정적을 몰락시켜 자신들이 쥐게 될 권력이기 때문이다.

저자들은 건국 초기부터 19세기 초반까지만 해도 미국인들이 정치 스캔들에 매료된 것은 황색 저널리즘만이 아니라 후보자의 사생활을 통해 관직에 취임한 후의 행동을 예측하는 데 유용한 기준으로 삼았기 때문이었다고 말한다. 그러곤 인터넷과 첨단 도청 장비를 통해 개인의 사생활에 대한 감시가 더욱 정교해진 지금, 사생활을 빌미로 정치인을 위협하기는 점점 더 쉬워지고 있지만 과연 그것이 정의인가를 묻는다.

결국 미국 정치사의 섹스 스캔들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성적 욕망보다 더 큰 욕망은 드물고, 한 개인의 성적 욕망이 세계사를 뜻대로 형성할 수 있게 하는 정치제도와 결합할 때 위험한 상황에 직면하게 된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책은 짜릿하고 매혹적인 인물을 지도자로 선출하려는 대중의 열망을 바탕으로 하는 민주정부의 본질을 생각할 때 정치에서 성 스캔들을 몰아내려면 정치인들이 정치에 몸담지 못하게 하거나, 구소련처럼 관료제 시스템으로 서열화되는 정치제도로 옥죄어야 할 것이라고 지적한다.

정치 스캔들을 일부러 터뜨리고, 도덕성 운동으로 정치적 이익을 얻어온 집단은 경제성장, 생명보호, 전쟁과 평화 등 유권자들이 정말로 중요하게 판단해야 할 사안들에 대한 관심을 성추문으로 돌려놓는 자들이고, 이것은 도덕성을 앞세운 보수파들의 정치적 음모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유권자인 시민들은 성관계를 강력히 규탄하는 배후에 도사린 더 뿌리 깊은 성욕이 국가를 지배하는 데 휘둘리지 말아야 한다는 게 저자들의 주장이다. 또 그러려면 관습에 도전하고 차별에 맞서 자유와 정의를 성취하기 위해 미국이 섹스 아래 하나 된 국가라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책의 도발적 결론은 민주주의의 기본 가치와 유권자들의 정치적 자각과 실천을 일깨우는 데로 나아간다.

이안 영화평론가

이미지 크게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