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크게보기 이왈종 화백의 ‘제주생활의 중도(장지에 아크릴릭)’시리즈 작품들. 2010년 작이다. 화사한 색채에 정감이 가득 넘친다.

미술평론가가 본 이왈종의 예술세계

이왈종 화백이 서울을 떠나 제주 서귀포에 터를 잡고 창작에 전념하고 있는 지도 오래됐다. 제주 서귀포란 공간이 갖는 좁은 영역에서의 삶이란 자연 단순해질 수도 있다. 그러나 서귀포가 주는 공간은 상대적으로 단순할지 모르나 제주 특유의 자연이 주는 건강한 풍광은 그의 삶과 예술을 더욱 풍요롭게 가꾸게 한 자양분이 됐다.

그의 작품 어디에나 서귀포 특유의 공간적 특징들이 명멸하며, 그 공간은 어느덧 환상의 여울로 넘쳐난다. 낮은 방안엔 언제나 남정네가 누워 책을 읽는가 하면 남녀가 작은 차탁을 앞에 두고 마주 앉아 있는 장면이 떠오른다. 밖엔 개와 사슴, 닭이 한가롭게 노니는가 하면 때로는 시장에 갔다 돌아온 여인네가 등장한다. 장독대와 담과 승용차가 있고 집 벽에는 골프채가 기대어 있다. 그의 일상의 단면이 극히 서술적으로 펼쳐지고 있다. 집 뒤로는 거대한 꽃나무가 화면을 덮는다. 활짝 핀 꽃들과 잎사귀 사이로 새와 물고기와 배와 방갈로, 그리고 골프를 치는 사람들이 어우러져 표현된다. 집을 중심으로 한 안의 풍경이 있고 나무 위엔 갖가지 자연과 인간이 펼치는 밖의 풍경이 있다.

서귀포란 현실의 공간이 무릉도원과 같은 낙원의 공간으로 오버랩되면서 현실과 환상이 상호 교차하는 독특한 세계를 펼쳐 보인다. 그의 작품 속으로 들어가다 보면 어느덧 현실은 저만큼 물러나고 열락의 세계에 자적하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예술의 힘은 현실을, 하잘것없는 일상을 무르익어 가는 환상의 세계로 탈바꿈시키는 것이라고나 할까.

그러고 보면 그의 화면은 농익어가는 장면들로 인해 몽환적인 경지에 이른다. 화면마다 넘쳐나는 것은 꽃이다. 동백, 유도화, 수선, 매화, 감귤나무, 연꽃 그리고 이름 모를 들꽃들이 지천으로 피어난다. 제주가 아니면 볼 수 없는 남국의 정서가 투명하고도 밝은 채감을 통해 아로새겨진다고 할까. 일상과 꿈이 겹치고 인간과 자연이, 인간과 동물이 범신적인 차원에서 서로 혼융된다.

이와 함께 빈번한 골프장의 풍경은 제주의 삶이 지닌 또 다른 풍요를 반영해 주는 것인지도 모른다. 골프장에서 일어나는 잡다한 일상의 작은 사건들이 은밀하게 암시되면서 무르익어 가는 자연 속에 파묻히는 모습은 해학적이다.

같은 주제를 다양한 매체를 통해 구현하려는 작가의 관심은 그만큼 자기 세계를 넓혀 가려는 의욕의 반영이랄 수 있다. 어느 한 매체에 고집스럽게 매달리는 작가가 있는가 하면 폭넓게 자기 세계를 넓히는 작가가 있다. 예컨대 같은 입체파 작가 가운데 브라크는 타블로 중심에서 거의 벗어나지 않았다면, 피카소는 타블로, 판화, 조각, 도자 등 조형 전 영역에 걸쳐 왕성하게 자기 세계를 펼쳐 보였다. 회화에서 부조에 이르는 이왈종의 작품 편력도 어느 한 곳에 안주하지 않고 그 관심을 다양하게 넓혀 가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그가 다루는 내용이 극히 제한돼 있는 만큼 그것을 담는 형식은 상대적으로 다양해질 수 있지 않나 생각된다. 따라서 다양한 형식적인 실험은 자기 세계에 안주하지 않으려는 작가의식의 자연스러운 발로라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예술은 어쩌면 꿈꾸는 일이고 꿈의 차원을 부단히 모색하는 작업이라고 할 때 이왈종의 작품은 일상을 꿈으로 치환해 놓는 놀라운 연금술의 작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바야흐로 무르익어 가는 꿈의 경지가 꽃처럼 활짝 열리고 있음을 만나게 된다.

오광수 미술평론가(전 국립현대미술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