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크게보기 1918년 4월 플랑드르에서 독가스에 눈이 먼 영국 병사들이 줄지어 야전 응급센터로 이동하고 있다. 열린책들 제공

군인 / 볼프 슈나이더 지음, 박종대 옮김 / 열린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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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저명한 언론인 볼프 슈나이더는 1925년생으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징집되어 무너져 가는 나치 정권을 위해 싸워야 했다. 그는 1945년 독일군 부사관 신분으로 미국 포로수용소에서 지낼 때부터 ‘군인’이라는 존재의 혼란스러움에 대해 숙고하기 시작했다. 군인이란 무엇인가, 누가 어떻게 군인이 되며, 왜 군인은 싸우고 피 흘리며 고통스럽게 죽어야 하는가. 어떤 무기로 어떤 전술로 싸웠는가. 군인의 현재와 미래는 무엇인가. 이런 질문에 대한 평생에 걸친 천착의 결과가 이 책이다.

‘이제 전쟁에는 군인이 필요 없다’는 장으로 시작하는데 무인전투기가 그 역할을 대신하기 때문이며, 핵미사일이 대기하고 있고 컴퓨터가 떠맡으며 자살 폭탄 테러와 유격대가 횡행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군인 시대에 황혼이 깃든다고 해서 평화가 도래하는 것은 아니다. 인간이라는 종이 생겨난 이래 다른 인간을 사냥하고 약탈하며 죽이는 일은 늘 현재진행형이라는 것. 특히 ‘타민족’에 대한 멸시와 인간 사냥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토대는 프랑스 혁명 과정에서 대두한 민족 국가 개념과 함께 절정을 맞았다.

방대한 자료 섭렵에 바탕을 두어 고금을 종횡하는 슈나이더의 장기는 이 책에서도 마찬가지다. 옛날 전투에서 말이 중요했던 이유는? 기병과 말 자체의 전투력과 속도 때문도, 공격당하는 자에게 가하는 심리적 압박 때문도 아니다. 오히려 기병 자신에 대한 심리적 효과 때문이란다. 말에 올라탄 상태로 빠르게 내달리다 보면 밑에서 움직이는 것들에 대한 사냥과 약탈, 살해의 유혹이 고조된다는 것.

군인의 최대 미덕이라는 용기. 그러나 “용기는 말에 지나지 않으며 수많은 불안이 들끓는 냄비 뚜껑과도 같다.” 2차 대전 당시 50만 명 가까운 미군이 심리 붕괴 문제로 조기 전역했다. 미군이 소지한 무기가 실제로 사용된 비율은 평균 15%밖에 되지 않았다. 베트남전에서 미군이 베트콩 한 명을 죽이는 데 평균 총알 5만 발을 사용했다. 총을 쏘아야 할 군인이 총을 쏘지 않는 가장 큰 이유는 자신이 죽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라 타인을 죽이는 것에 대한 두려움, 살인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다.

주말 예능프로그램 ‘진짜 사나이’를 보는 시청자들은 조교가 출연자들을 혹독하게 ‘돌리는’ 모습을 즐긴다. ‘군인을 혹독하게 훈련시킨다’는 뜻의 독일어 drillen은 고대엔 ‘돌리다’라는 뜻이었다. “수천 명의 개인을 동시에 움직이고 동시에 고통받게 하면서 복종심을 심어 주어 한 덩어리로 담금질하는” 훈련의 기본 중의 기본, 즉 발맞추어 걷는 동보(同步) 행진을 1720년에 처음 접한 프로이센 사람들은 그것을 거짓말로 여겼다. 한 사람이 다른 모든 사람과 똑같이 발을 맞추어 걷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후 10년이 지나서야 프로이센군에 동보 행진이 전면 도입되었다.

군인과 전쟁, 전투에 관한 다양한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 놓은 저자가 평화에 대해서는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평화는 인간의 자연 상태가 아니고 인간도 원래 평화를 사랑하는 족속이 아니며, 코란뿐 아니라 성경, 유엔도 평화를 결코 최상위 가치로 여기지 않는다. 지구 상 곳곳에서 힘으로 평화를 구현해 낼 세계 정부는 바랄 수도 없고, 전 지구를 감시하는 거대한 군사경찰기구가 될 것이기에 바람직하지도 않아 보인다.” 이러한 저자의 태도는 냉소적이거나 비관적이기보다는 현실적이다. 군인이라는 현실을 직시하게 만드는 이 책을 저자는 “지금껏 존재한 모든 군인들을 위한 기념비”로 바친다.

표정훈 / 한양대 특임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