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크게보기

김회평 / 논설위원

어김없이 봄은 온다. 어느 날 문득 꽃을 앞세워 겨우내 잠겨 있던 감성을 깨운다. 꽃은 홀로 오지 않는다. ‘꽃 피는 것 보면 알지/ 그리운 얼굴 먼저 떠오르지’(함민복, ‘봄비’). 꽃이 사람을 위해 아름다운 건 아니지만, 사람은 꽃으로 삶을 채색하고 빈 곳을 채운다. 수백 년 풍상을 겪은 노수(老樹)도 해마다 여린 꽃잎을 밀어 올리듯, 꽃에는 나이가 없다. 누군가, 봄은 매일 기적을 목격하는 계절이라고 했다.

남녘에선 벌써 꽃소식이 분분하다. 제주 한림공원과 전남 순천의 금둔사, 경남 양산의 순매원에는 매화가 한창이라고 한다. 이른 매화를 찾아다니는 탐매객(探梅客)들이 분주해졌다. 그래도 봄꽃이라면 개나리·진달래·벚꽃이다. 매년 개화 시기는 달라도, 화신(花信)은 꼭 이 순서대로 온다. 기상청 예보로는 올해 개나리가 3월 15일 제주 서귀포에서 꽃을 피우기 시작해, 4월 2일이면 중부 지방에서 절정을 이룬다. 진달래는 사흘 늦은 3월 18일 서귀포를 출발해 역시 보름쯤 걸려 서울 부근에 도착한다. 푸근한 날씨 덕에 예년보다 1∼3일 일찍 찾아온단다.

‘서귀포에 벚꽃이 피는 건 3월 17일/ 어머니 사시는 부산 이기대 바다는/ 23일이다…바다를 건너오는데 무려 일주일이나 걸리다니/ 벚나무는…돛단배를 타고 오나 보다’(손택수, ‘벚꽃 개화예상도를 보며’). 이기대 언덕의 벚나무에 부친의 수목장을 한 시인은, 그 일주일 동안 수평선을 보며 꽃이 건너오길 기다릴 어머니를 생각한다. 꽃은 보는 것보다 기다릴 때 간절하다. 기상청 예보로 굳이 따져본 꽃의 북상 길은 시속 1㎞ 남짓이다. 대략 아이들이 걷는 속도와 비슷하다고 한다. 봄의 전령사는 이렇듯 어린이 걸음으로 천천히 온다.

개화와 낙화 사이의 짧고 화려한 시간이 꽃의 전부는 아니다. 봄꽃을 피우기 위해서는 여름부터 꽃눈을 만들어 준비하는 과정을 거친다. 날씨가 추워지면 잠이 드는데, 여기서 깨어나려면 일정 시간 추위를 겪어야 한다. 필요한 분량의 냉기를 채운 뒤에는 따뜻한 온도에 노출되는 기간을 거쳐 개화에 이르게 된다. 붉고, 노랗고, 하얗게 눈부신 꽃잎들은 춥고 어둡고 지루한 역정의 산물이다. 은총처럼 불쑥 찾아오는 것이 아니다. 꽃 걸음이 더딘 까닭을 손택수 시인은 이렇게 붙였다. ‘세상에는 꽃의 속도로 잊어야 할 것들이 있어서/ 꽃의 속도가 아니면 잊을 수 없는 것들이 있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