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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속 / 니콜라 데이비스 글, 로라 칼린 그림 / 사계절 펴냄

약속이 있는 사람은 쉽게 삶을 포기하지 않는다. 대도시가 외로운 이유는 먼저 약속을 하자는 사람이 별로 없고 누구도 다른 사람의 약속을 궁금해하지 않기 때문이다. 작은 약속을 지키려고 애쓰는 사람들의 노력은 대부분 총총걸음이나 빌딩 숲 인파에 묻혀 버리고 만다. “어디 가는 길이세요?”라든가 “잘 되면 좋겠어요” 같은 이웃의 인사말도 드물다. 그림책 ‘약속’은 그런 거친 도시의 뒷골목에서 별다른 약속도 없이 살아가며 다른 사람의 빈약한 주머니를 털던 한 소매치기 여자아이의 이야기다.

표지를 넘기면 투명한 유리병이 얼룩진 보도블록 위를 굴러다니는 그림이 나온다. 비둘기 한 마리만이 그 병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축복의 비 한 방울 내리지 않는 더럽고 가난하고 흉측한 도시에서’ 주인공 소녀는 이 유리병처럼 버려진 삶을 산다. 그런데 어느 날 늙은 여인의 가방을 훔치다가 들킨다. 이 노부인은 ‘가방 안에 든 것을 심겠다고 약속하면, 놓아주겠다’는 알쏭달쏭한 말을 던지는데 소녀는 덜컥 약속해 버리고 만다. 가방 안에는 돈이 아니라 도토리가 가득 들어 있었고 소녀는 푸른 도토리를 보자 노부인과의 약속을 저버리지 못하고 메마른 도시 곳곳에 도토리를 심기 시작한다. 소녀의 도토리는 새싹이 되고 나무가 되어 나무그늘에서 차 마시는 사람을 불러오고 이야기와 웃음과 꽃을 가져온다. 고향 마을에서 약속을 완수한 소녀는 남은 도토리를 심으면서 중동의 사막을, 홍등이 가득 걸린 중국의 밤길을 여행한다. 그리고 어느 낯선 골목에서 다른 젊은 가방 도둑을 만나게 되자 노부인처럼 흥정을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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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쓴 니콜라 데이비스는 이 그림책을 통해 ‘변화는 아주 작은 약속으로부터 시작되며 그 약속은 당신이 충분히 지킬 수 있는 일’이라고 말해준다. 아무도 돌봐주지 않았던 소매치기 소녀는 씨앗 도토리를 돌보면서 자기 존재의 소중함을 깨닫고 삶을 좌절에서 건져낸다. 그 작은 손으로 황폐한 도시를 온통 푸르게 만들 수 있었던 힘은 노부인과 맺은 약속에서 왔다. 그림을 그린 로라 칼린은 자신의 첫 그림책인 이 책으로 2014년 볼로냐 라가치상 우수상을 수상했다. 책장을 넘기다 보면 무표정한 도시의 매연 속에서 도토리가 자라고, 온갖 꽃과 나무, 새들이 찾아오는 그림 속 풍성한 변화가 벅찬 감동을 준다. 빈 병이 쓸쓸하던 무채색 앞면지와 뚜렷하게 대조되는 뒷면지의 자유분방하고 원색적인 숲 그림을 놓치지 말 것.

김지은 <어린이·청소년문학 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