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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학용 / 논설위원

세금은 호랑이다. 주변에서 얼쩡대다간 쏜살같이 달려와 덥석 물어뜯는다. 그렇다고 마냥 피할 순 없다. 필요악이니까. 벤저민 프랭클린은 “세상에서 확실한 건 세금과 죽음뿐”이라고 했다. 그래서 인류역사는 세금투쟁의 역사다. 대표적인 예가 민주 헌법의 초석으로 평가받는 마그나 카르타(대헌장) 제정이다. 세권(稅權)을 휘둘렀던 영국의 존 왕은 봉건영주의 조세저항에 항복해 ‘대표 없인 과세 없다’는 역사적 계약에 서명한다. 800년 전의 일이다. 미국 독립전쟁을 촉발한 보스턴 티 파티 사건도 발단은 영국 조지 3세의 억지 징세다.

소급입법으로 봉합된 올 연말정산 파동도 세금 잔혹사의 아류다. 예상대로 국민을 향했던 ‘13월의 폭탄’이 부메랑이 되어 정책의 최종 결정자에게 떨어졌다. 박근혜정부로선 억울할 수도 있다. 이번 사태의 불씨가 조세 형평성을 높여야 한다는 사회적 합의에 따라 도출된 세액공제 방식이기 때문이다. 세법 개정안이 1년 전 공포돼 마음의 준비가 돼 있으리라 여겼던 납세자들이 뚜껑이 열리자 돌변하니 당황도 했을 게다. 그러나 그간의 조세정책과 세무행정을 되짚어 보면 이번 분노는 누적된 실정(失政)에 대한 ‘이유 있는’ 아우성임을 알 수 있다.

우선, 조세정책에 대한 국민 불신이 임계점을 넘어섰다. 중산층은 최악이다. 정부가 국민 설득용으로 호언했던 정책 목표가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가는 경우가 숱하기 때문이다. 트리클 다운(고소득층의 부가 늘면 중·저소득층의 혜택도 는다는 낙수효과) 운운하며 부자 감세를 해왔지만 조세의 소득재분배 효과는 악화일로다. 소득재분배 개선율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꼴찌 수준이다. 가처분소득은 제자리인데 가계부채는 뜀박질하고 있는 상황에서 중산층의 세 부담 증가율은 고소득층의 3배에 달한다. 이 마당에 이번 파문의 최대 피해자 또한 연 소득 7000만∼9000만 원대라니 중산층의 화(火)를 해프닝으로만 깎아내려선 안 될 일이다.

둘째, 우리나라에서 조세 정의가 실현되고 있다고 확신하는 이들은 별로 없다. 이번 사태도 연말정산이 조세 형평을 이루는 최적 수단이라고 굳게 믿던 중산층이 세금을 토해내야 할 처지에까지 몰리자 토해낸 울분이다. ‘모든 국민은 법률이 정하는 바에 따라 납세의무를 진다’는 헌법의 국민 개세주의(皆稅主義) 원칙은 ‘유리지갑’ 앞에서만 그 권위를 뽐낼 뿐이다. 근로소득자의 37%가 세금 한 푼 안 낸다는 통계는 국민이 애써 외면하려는 불편한 진실이다. 이들 중엔 덕지덕지 붙은 공제 항목 뒤편에서 무임승차하는 이도 제법 많다. 고소득 전문직·자영업자도 장군멍군이다. 이들의 소득 파악률은 고작 62.7%, 나머지는 세금 무풍지대다. 50년 가까이 얼렁뚱땅하는 종교인 과세는 정부의 국민 개세주의 실현 의지가 박약함을 보여주는 또 다른 증좌(證左)다.

끝으로, 정부의 정책 역량 문제다. 애덤 스미스는 국부론에서 4대 조세원칙을 제시했다. 형평성, 명확성, 편의성, 징세비 최소성이다. 그러나 국민은 정부가 이런 원칙을 잘 지키는지에 대해 의구심을 품는다. 이번에 드러난 엉터리 추계와 조삼모사식 대응 등도 그 단초다. 세제실과 예산실 간 견제와 균형의 상실은 기획재정부 내 갈등을 넘어 정책을 왜곡시키고 국가 재정에도 악영향을 미치는 중대사다. 당정이 ‘그린베레 작전식’으로 해치운 소급입법은 세계 조세사에 남을 황당한 악례(惡例)다. 재정학 교과서에 “세제는 오래된 게 언제나 좋다”는 말이 있다. 세제·세정은 자주 뜯어고치면 국가 혼란을 자초할 뿐 아니라 무능을 자인하는 격이어서 바람직하지 않다.

세(稅)는 곡식 ‘화’(禾)와 기뻐할 ‘태’(兌)가 합쳐진 한자다. ‘내가 거둬들인 곡식을 바치는 일은 기쁜 일’이라는 의미다. 내가 내는 세금이 국가를 위해 잘 쓰이길 바라는 마음이 담겨 있다. 그런 이타적 정신이 깔려 있는 세금을 놓고 벌어진 이번 사태는 우리에게 여러 교훈을 던진다. 정부는 세금 개혁을 추진할 때 솔직하고 정교해야 한다. 급할수록 돌아가는 지혜도 필요하다. 국민도 자신의 소득세에 집착하는 만큼의 애착을 갖고 국가 예산은 제대로 집행되고 있는지, 국가 재정은 복지 수요에 걸맞게 잘 설계돼 있는지 등에 대해 꼼꼼히 따져보는 자세를 생활화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