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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 집 / 토니 주트 지음, 배현 옮김 / 열린책들

책은 고독하고 고통스러운 불면의 밤의 기록이다. 하지만 고통스러운 밤의 기록은 아름답고 감동적이다.

영국 역사학자 토니 주트(1948∼2010)의 밤을 고통스럽게 만든 것은 근위축성 측색 경화증, 루게릭병이다. 지난 2008년 루게릭병 진단을 받은 뒤 그의 몸은 서서히 마비돼 이내 의료 장비 없이는 숨조차 쉴 수 없게 된다. 그의 몸은 “한 주가 지날 때마다 6인치씩 면적이 줄어드는 감방, 가석방 없이 진행되는 감금”이다. 그러니 어김없이 찾아오는 밤은 참을 수 없는 고통 중 하나였다. 간호사가 군사작전하듯 그를 힘들게 침대에 옮기고 돌아가면 그는 목과 머리를 제외하고 움직일 수 없는 상태에서 잠들기만을 기다려야 했다. 그런 밤이면, 그는 머릿속으로 온갖 이야기를 만들었다. 이야기는 충분히 흥미로워야 했다. 그래야 귓속이나 등허리의 참기 힘든 가려움을 견딜 수 있기 때문이었다. 삶과 생각, 기억과 환상, 과거와 더 먼 과거를 좇던 그는 자신이 이전에 전혀 관계없다고 생각한 기억의 편린들을 레고 조각처럼 맞추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상실은 상실. 나의 밤들은 제법 흥미진진했다.”

떠오른 기억들을 몸을 움직여 글로 남길 수 없는 그는 초기 모더니즘 사상가와 여행가들이 세부 묘사를 저장하고 회상하기 위해 이용한 기억 방식을 썼다. ‘기억술사’라 할 만한 그들은 머릿속에 거대한 궁전을 짓고 궁전 곳곳에 정보를 넣어두었다. 기억의 공간화 작업이었다. 주트는 궁전 대신 어린 시절 가족과 함께 떠난 스위스 여행에서 머물렀던 샬레를 기억해내고, 샬레 곳곳에 기억들을 분류해 저장했다. 기억의 집이다.

2차세계대전 직후 런던 거리에서부터 21세기 뉴욕 주방을 오가는 시간과 추억들, 차를 사랑했던 아버지, 즐겨타던 버스와 기차, 학창시절 독일어 선생님, 1960∼1970년대 킹스 칼리지와 파리 고등사범학교의 학창시절, 10대 키부츠에서 겪은 경험…. 그가 삶을 되돌아보며 쓴 (정확하게 말하면 구술한) 이 아름답고 문학적인 자전 에세이는 2010년 1월부터 ‘뉴욕 리뷰 오브 북스’에 연재됐고, 그가 세상을 떠난 뒤 이 책으로 묶여나왔다. 평소 ‘더 나은 삶을 상상하라’고 했던 지식인의 성찰은 몸에 갇혀 죽음을 향해 가면서도 여전히 예민하기만 하다. 런던 버스 노선에 대한 애틋함은 시민 의식과 도시 계획 이야기로, 68혁명의 기억은 혁명세대로 불리는 자기 세대에 대한 평가로, 케임브리지대 청소부에 관한 기억은 노블레스 오블리주에 대한 성찰로, 청년 시절 돈을 벌기 위한 육체 노동의 기억은 노동의 미덕을 설파하고 실업자들을 부도덕하다고 몰아세우는 세태에 대한 풍자로 이어진다.

주트를 따라 그의 기억과 추억, 시대의 초상을 따라가다 보면 갇힌 육체 속에서도 마지막까지 좋은 삶은 무엇인가를 고민하는 그의 정신의 힘에 경건해진다.

그는 한 대목에서 이렇게 말한다. “사랑이란 가장 만족스럽게 자기 자신이 되는 상태다. 이 말이 역설적으로 들린다면, 사랑이란 사랑하는 이에게 그 자신이 될 공간을 남기면서 그 안에서 자아가 안심하고 꽃피울 수 있게 하는 것이라는 릴케의 충고를 떠올려 보라.”

최현미 기자 chm@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