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현종 / 논설위원

이명박 정권이 힘을 잃기 시작했던 변곡점(變曲點)은 집권 3년차인 2010년 6월 29일 ‘세종시 수정안’이 국회에서 부결된 때부터다. 노무현 정권의 유산인 행정중심 복합도시를 교육과 과학을 중심으로 하는 경제도시 건설로 선회하려는 계획을 추진했지만 친박(親朴)의 강력한 반발에 막혀 좌절됐다.

당시 여당 원내대표로 타협안을 내 중재를 시도했던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는 수정안 부결을 주도한 박근혜 대통령과 사이가 멀어졌고 급기야 2년후 19대 총선 공천탈락이라는 ‘정치보복’까지 당했다. 반면 우직하게 약속을 지켰다는 ‘미생지신(尾生之信)’의 미생처럼 ‘원칙과 약속’을 강조하며 원안 고수를 견지한 박 대통령은 완벽한 정치적 승리를 안았다. 박 대통령은 약속을 지키는 정치인이라는 정치적 자산을 가졌을 뿐만 아니라 당내 주도 세력도 친이(親李)에서 친박으로 넘어가는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그야말로 수정안 반대는 친박에겐 충성을 맹세하는 ‘신앙고백’같은 것이었다.

이런 모든 과정을 직접 지켜본 김 대표가 이젠 개헌(改憲)이라는 칼을 뽑아들었다. 지난 16일 중국 방문중 기자간담회에서 ‘이원집정부제 개헌론’을 제기했다 논란이 커지자 하루 만에 꼬리를 내리긴 했지만 칼을 버린 것은 아니다. 오히려 위력을 한번 보여주고 다시 칼집에 넣은 모양새다. 주박야김(晝朴夜金)하며 눈치를 보던 의원들에게도 이제 선택의 순간이 다가오고 있음을 알리는 징조와 같다. 개헌은 ‘미래권력’엔 판을 흔들 수 있는 무기이지만 ‘현재권력’에는 ‘블랙홀’같다. 1987년 직선제 개헌 이후 27년 동안 수없이 개헌론이 제기됐고, 1997년에는 내각제 개헌을 고리로 한 DJP연합이 정권을 잡았지만 결국 불발됐다. 박 대통령도 예외가 아니다. 2001년 한나라당 총재단 회의에서 “경제 구조조정을 하고 있는데 정치도 구조조정을 해야 하며, 그런 차원에서 개헌도 고려해야 한다”고 했고, 2008년에는 “(개헌 논의를) 빨리 시작할수록 좋다”고 했다. 그러나 지난 6일 수석비서관회의에서 “개헌 논의 등 다른 곳으로 국가 역량을 분산시킬 경우 또 다른 경제 블랙홀을 유발시킬 수 있다”며 반대 입장을 분명히했다. 개헌 논의가 시작되면 ‘4년중임 대통령제’ ‘내각제’ ‘이원집정부제’ 등 권력구조 문제에서부터 시작해 논쟁의 소지가 한두 가지가 아니다. 하나하나가 모두 폭발성을 갖고 있어 다른 국정과제들은 뒤로 미뤄질 수밖에 없다.

헌법이 변하지 않는 도덕률은 아니다. 국가 발전에 필요하다는 국민적 공감대가 형성된다면 개헌도 필요하다. 그러나 지금 정치권에서 불거진 개헌 논의는 주체, 시점, 의도 등 여러가지 면에서 개운치 않다. 일반적으로 제도의 개혁은 구성원들이 열심히 노력해도 제도적 한계 때문에 목적을 이뤄내지 못할 때 필요하다. 5년 단임 대통령제가 승자독식 구조를 고착화해 극단적 대립을 불러일으킨다거나 단임으로는 중요한 국정과제를 수행할 수 없다는 지적 등은 모두 일리가 있다. 그러나 박정권 출범 이후 계속되고 있는 극단적인 여야 대립과 청와대의 독선·독주가 과연 제도 탓인가. 패배를 인정하지 않는 정치문화, 수권(受權)정당이 되기보다는 계파이익에 우선한 정당, 국익보다는 오로지 당의 이익을 먼저 생각하는 구태(舊態)가 주범이다.

이를 놔두고 개헌만 하면 모든 것이 잘될 것 같이 선전하는 것은 본말전도다. 만약 지금 같은 정치 풍토에서 이원집정부제가 도입돼 여당 대통령에 야당 총리가 된다면 국정이 잘 굴러갈 수 있겠는가. 세월호특별법 논란 와중에서 보여주었듯이 5개월 동안 법안 하나 통과시키지 않아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는 것이 정치권의 민낯이다. 이런 국회의원들이 내각제를 한다고 무엇이 달라지겠는가.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4년 중임제의 두 번째 임기 시작과 함께 레임덕을 맞고 있다.

지금 정치권에 급한 것은 개헌이 아니라 철저한 자기반성과 정치개혁이다. 있는 헌법도 지키지 못하고 발목이나 잡으면서 개헌한다고 하면 국민이 그 진정성을 믿을 수 있겠는가. 더욱이 개헌 논의가 차기 주자로 부상하기 위한 수단이 된다면 곱게 봐줄 리 없다. 개헌 논의 이전에 변화한 모습부터 보여주는 것이 제대로 된 순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