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크게보기 지난 9월 25일 경남 밀양시 산외면 보라마을 신고리 원전∼북경남변전소 765㎸ 송전선로 공사 현장에서 한전 근로자들이 송전탑에 전기선을 연결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정하종 기자 maloo@munhwa.com

지난 9월 25일 경남 밀양시 산외면 보라마을에서 한국전력공사 근로자들이 이틀 전 완공된 송전탑의 전기선을 연결하는 가선 작업을 벌이고 있었다.

간신히 송전탑 공사는 끝났지만, 지난 2006년 송전탑 건립을 반대하는 마을 주민들이 대책위원회를 꾸린 뒤 8년간 갈등 조정 기회를 놓치면서 마을 곳곳에는 갈등의 상처가 여전히 남아 있었다.

마을 보호를 명목으로 시작됐던 갈등이 탈핵 운동 등으로 변질됐다가 급기야 마을 공동체가 붕괴된 아픔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것이다. 밀양 송전탑 공사 현장은 이처럼 우리 사회의 전형적인 갈등 전개 양상을 가장 잘 보여주는, 가장 최근에 발생한 갈등의 현장인 셈이다.

◆비선호시설 입지갈등, 8년 동안 진화 = 이날 밀양시 산외면 보라마을에 있는 ‘밀양 송전탑 반대대책위원회’ 사무실에는 비록 9월 23일 공사가 끝났지만, 주민 10여 명이 모여 대책회의를 하고 있었다. 대책위 사무실 벽면에 붙은 ‘부북면 팔십세 박할머니’의 공사 중단 호소문과 송전탑이 지나는 마을 곳곳에 걸린 송전탑 건설 취소를 요구하는 현수막은 아직까지도 남아 있는 갈등 상황을 보여주고 있었다.

밀양 송전탑 사태는 다른 송·변전 선로 관련 문제와 같이 비선호시설 입지 갈등에서 시작됐다. 2000년 1월 정부와 한전은 제5차 장기 전력수급 계획에 따라 신고리 원자력발전소 전력을 전력계통에 연결하는 신고리∼북경남 송전선로 사업을 추진했고, 이때부터 내재된 갈등은 2005년 5월 환경영향평가 초안 공람 및 주민설명회와 함께 불이 붙기 시작했다. 이후 2006년 ‘765㎸ 송전사업 밀양시대책위원회’가 출범하며 본격적으로 갈등이 표출됐다.

전형적인 비선호시설 갈등으로 전개되던 밀양 송전탑 사태는 2008년 한전과 주민들 사이에 합의가 불발되며 관련법 개정과 연결된 구조적 갈등으로 확대된다.

2009년 3월 밀양송전탑을 반대하는 주민들은 송·변전설비 건설로 갈등을 겪고 있는 다른 지역 주민들과 연대해 전국 송·변전반대공동대책위원회를 출범시켰고, 전원개발촉진법 개정 등 법제 개선을 촉구했다.

2013년 말 ‘송·변전시설 주변지역 보상 및 지원에 관한 법률’이 국회 본회의에서 통과되자 주민들의 재산권·평등권 등을 침해하는 요소가 있다며 위헌소송에 나서기도 했다.

2011년 발생한 후쿠시마(福島) 원자력발전 사고와 2012년 1월 발생한 밀양 주민 이치우 씨의 분신 사망사건은 밀양 사태를 ‘탈핵운동’과 결합하게 하는 계기가 됐다. ‘핵 없는 사회를 위한 공동행동’ 등 탈핵운동 단체들은 2012년 1월부터 밀양 사태에 개입, 정부의 원자력 중심 전력 정책을 비판하고 나섰다.

현택수 한국사회문제연구원장은 “밀양 사건은 초기에 서로가 조금씩 양보했다면 쉽게 해결될 수도 있었던 사건이지만 장기화하면서 각종 단체가 개입해 갈등의 범주가 확장된 대표적인 경우”라고 분석했다. 이강원 한국사회갈등해소센터 소장은 “일반적으로 송·변전 시설 관련 갈등에는 입지 문제, 법적·구조적 문제, 국가 전력체계 문제가 항상 내재돼 있는데, 밀양의 경우 사태가 장기화하며 이 같은 문제가 복합적으로 드러났다”고 지적했다.

◆조정 기회 놓쳐 갈등 장기화 = 밀양 송전탑 사태는 갈등 해소가 가능했던 중요한 기회들을 놓치며 장기화했다. 2011년 한국사회갈등해소센터 주관으로 한전과 밀양 주민들은 보상에 구두 합의했지만, 지역지원사업비 등의 미세한 금액차이로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

같은 해 11월에도 송·변전시설 관련 제도개선추진위원회에서 보상 법안을 잠정 확정했지만 정부와 한전측의 연내 보상법안 법제화 약속이 이행되지 않자 주민들의 불신만 키우는 꼴이 됐다. 이 과정에서 2012년 1월 이치우 씨의 분신 사건이 발생했고, 보상법제화를 둘러싼 주민 간 내분까지 발생하며 갈등은 증폭됐다. 대책위 측은 갈등 장기화의 원인에 대해 “최근 발생한 청도 송전탑 돈봉투 사건에서 보듯 한전이 주민들의 의견을 반영하려는 의지 없이 보상패러다임으로만 문제에 접근해 사태가 장기화했다”고 주장했다. 반면 한전측은 “주민들 사이에 외부 세력이 들어와 잘못된 정보를 퍼뜨려 갈등이 해결되지 못했다”고 반박했다.

한국사회갈등해소센터는 2013년 발간한 ‘밀양 사태 현장리포트’에서 “갈등에서 제3자의 조정은 한계가 있어 당사자들이 보다 적극적인 태도로 협상에 임해야 해결가능한데, 밀양의 경우 초기에 갈등이 해결되지 못하고 감정의 골이 깊어져 사태가 장기화했다”고 분석했다.

밀양 송전탑 사태가 8년이라는 시간을 끌며 장기화한 데는 갈등조정을 위해 투입된 제3자의 역할이 제한돼 제대로 된 조정이 이뤄지지 않은 것도 한몫했다. 2013년 5월 박근혜 대통령이 “밀양 갈등과 관련, 정부가 진정성을 갖고 노력하는 게 중요하다”는 발언을 한 뒤 국회 중재로 ‘밀양문제 해결을 위한 전문가 협의체’가 구성됐지만 40일간의 짧은 논의기간, 중립적인 전문가 부재, 협의체 결과에 대한 국회의 모호한 권고로 갈등은 오히려 격화됐다.

◆갈등 장기화로 붕괴된 마을 공동체 = 밀양 송전탑 사태의 가장 큰 문제점은 주민들 사이에 2차 갈등이 발생해 공동체가 심각하게 파괴됐다는 것이다. 한전에 따르면 1일 현재 밀양 송전탑 경과지 마을 30곳 중 29곳이 마을보상에 합의했으며, 2198가구 중 90%인 1976가구가 개별지원금을 수령했다. 이 과정에서 주민들 사이의 감정 다툼은 극에 달했다. 이웃주민 간 고소·고발은 물론 친척들 사이에서도 의견차이로 반목하는 일이 생겼다. 송전선로가 지나는 밀양시 단장면 동화전마을 주민 김정회(51) 씨는 “이번 사태로 인해 수십년간 가까이 지내던 이웃을 잃은 것이 가장 가슴 아픈 현실”이라고 지적했다.

임운택(사회학) 계명대 교수는 “송전탑 완공 이후에도 와해된 마을 공동체는 앞으로의 주민들의 삶에 영향을 미칠 것”이라며 “밀양뿐만 아니라 다른 분쟁지역에서도 생길 수 있는 현상으로, 본래 갈등보다 더 심각한 문제”라고 분석했다.

밀양 = 김대종 기자 bigpaper@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