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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석경 ‘이 고도를 사랑한다’

소설가 강석경 하면 경주, 경주의 작가라면 강석경이 떠오른다.

그에게 경주는 흔히 말하는 ‘육신의 고향’이 아니다. 그가 태어나 10대 중반까지 보낸 곳은 대구이다. 소설 ‘숲속의 방’으로 1980년대 청춘들을 뒤흔든, 이 예민하고 섬세한 감각의 작가는 30대에 경주 향토사학자인 윤경열(1966∼1999) 선생을 인터뷰하면서 경주를 보게 된다.

그전까지 그에게 경주는 아무 연고도 없는, 불국사가 있는 관광도시였을 뿐이었다. 경주를 봐도 본 것이 아니었다. 문학잡지에 연재중이던 예술가 인터뷰를 위해 만난 윤 선생은 강석경에게 화랑과 석굴암, 신라의 아름다움을 이야기했고 신이한 설화를 들려주었다. 선생의 아득한 이야기가 아니더라도 그는 도심 한가운데 솟아있는 능에 사로잡혔다. 묘역이라면 사람들이 살아가는 공간과 멀리 떨어져 있기 마련인데, 경주의 능은 사람들 속에 있었다.

신라백화점 5층 엘리베이터 안에서 낮은 빌딩 사이로 솟아있는 능을 보았을 때, 그는 감탄사를 내뱉지 않을 수 없었다. “산 자와 죽은 자가 가족으로 더불어 살고 있다니.” 그뒤 그는 쉽게 가라앉지 않는 귀향병을 앓았다. 결국 10년 뒤 경주로 돌아가 우리 시대가 잃어버린 골목골목이 있고, 담장 너머엔 석류와 모과가 익어가는, 그리고 당연히 거대 고분군이 옆에 있는 황남동에 자리잡았다. 그렇게 20여 년 강석경은 경주에 살며, 매일 걷고, 매일 보고, 매일 탄복한다고 한다. 20년 넘게 일상적으로 보고, 느끼고, 살아가는 곳을 매일 새롭게 탄복할 수 있다니, 얼마나 큰 축복인가. 경주는 그런 천년 고도이다.

‘이 고도를 사랑한다’(난다)는 경주를 보고, 느끼고, 걸으며 쓴 경주 산문이다. 작가가 10년 전 내놨다가 절판돼 사라진 산문집 ‘경주산책’을 바탕으로 그 뒤 10년간 쓰고 또 쓴 글들을 정리해 다시 경주에 책을 바쳤다. 제목이 말하듯 감출 수 없는 사랑 고백이다.

책은 우리들 삶이 그렇듯, 시·공간이라는 두 축으로 흘러간다. 각 챕터는 용장사지, 계림로, 괘릉, 동궁과 월지, 황룡사지, 남산동, 무열왕릉, 교동, 인왕동으로 끝없이 이어지고, 전체적으로 경주의 봄에서 시작해 경주의 겨울로 끝난다. 이 시·공간 속에서 작가는 경주에 대해, 삶에 대해, 예술과 글쓰기에 대해, 만나고 헤어진 사람들과 인연에 대해 이야기한다. 죽은 자들의 능 앞으로 산 자들이 오가고, 만나고, 헤어지고, 사랑하고, 울고, 웃고…. 이 인간사를 무심히 지켜보는 천년 능은 시간의 법칙에 따라 다시 대지로 돌아가 둔덕이 되는 곳. 삶과 죽음이 함께하고, 먼 시간은 현재의 공간이 되는 곳에서 풀어내는 사색이니, 이 사색의 운명은 깊고 아련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독자들 역시 속도라는 시대의 습속에서 벗어나 천천히 읽어갈 수밖에 없다. 처음엔 작가의 경주 산책을 흘깃거리며 쫓아달리다, 나란히 가게 되고, 어느새 하나가 돼 천천히 걷게 된다. 건축 제한으로 전국에서 녹지비율이 가장 높은 도시, 도심엔 능이 있고 시가지를 벗어나면서 들판이 펼쳐지는 자연의 도시, 하늘에 뜬 초승달 같은 궁궐 땅을 휘돌아 완만하게 흐르는 문천을 닮은 느림의 공간인 경주. 독자들도 경주의 시간에 맞춰, 천천히 아주 천천히 걸어가다보면 어느새 천천히 걸어가는 자신의 뒷모습을 보게 될지 모른다. 강석경이 이끄는 경주는 그런 곳이다.

“흑백 인물 사진으로 유명한 패션사진의 대가 피터 린드버그는 흑백 사진을 고집하는 이유에 대해 ‘현실은 컬러다. 현실을 벗어난 흑백 사진을 사랑한다’고 말했다. 나는 이렇게 바꾸어 말한다. 현실을 벗어난 고도를 사랑한다. 현실을 벗어났기에 환상을 주는 고도. 경주가 주는 환상은 내게 영감의 원천이고 흑백 같은 유적지들은 본질을 돌아보게 한다.”(p20)

책 표지를 펼치면 나오는 경주 산책코스 지도는 고마운 덤이다. 작가가 소개한 경주의 곳곳, 중독성이 있는 경주식 고기구이같이 맛있는 집도 표시돼 있다. 경주 출신 화가 김성호의 경주를 테마로 한 그림이 글의 분위기를 더한다. 예술가들이 자신이 익숙한 공간을 걸으며 사색을 풀어내는 출판사의 ‘걸어본다’시리즈의 두 번째 책이다.

최현미 기자 chm@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