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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리 레비 ‘아메리칸 버티고’

신문사 발행인을 지낸 한 선배는 한동안 이렇게 적힌 명함을 들고 다녔다. ‘걷는 사람.’ 한 유명 소설가는 자신의 책 앞날개에서 프로필을 한 줄로 요약했다. ‘자전거 레이서.’ 두 사람의 공통점은 여행을 많이 다닌다는 것이다. 한 사람은 걸어서, 또 한 사람은 자전거를 타고. 이들의 여행기는 육체를 움직여서 만난 풍경의 속살을 깊숙하게 들여다본다.

프랑스의 지식인 베르나르 앙리 레비는 자동차로 미국 전역을 돌아 봤다. 그는 여행가로 이름난 사람은 아니다. 철학, 언론, 문학의 경계를 넘나들며 종횡무진 글을 써 대는 저술가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는 잡지 ‘월간 애틀랜틱’ 편집장으로부터 알렉시 드 토크빌(1805∼1859년)의 방식대로 여행해달라는 제안을 받고 미국 횡단을 실행했다. 19세기 프랑스 철학자 토크빌은 미국의 감옥을 탐방하겠다는 목적으로 여행에 나섰다가 미국 사회 전역을 돌아보고 ‘미국의 민주주의’라는 역저를 남긴 바 있다.

앙리 레비는 300여 일 동안 1만5000여 마일에 달하는 대장정을 했다. 그 결과로 나온 여행기가 이 책 ‘아메리칸 버티고(American Vertigo·황금부엉이). 미국에 가지 않아도 동서남북을 두루 살피는 느낌을 주는 책으로 정평이 나 있다. 2006년 초판이 나온 이후로 한국을 비롯한 세계 각지에서 꾸준히 읽히고 있다.

오늘날 우리에게 미국이란 무엇일까. 프랑스의 대표적 ‘먹물’인 저자는 세계의 중심국가라며 뻐기는 미국의 천박한 속살을 만천하에 드러내고 싶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여행기에서의 미국 정체는 모호하다. 뭐라고 말할 수 없는, 중층적이고 복잡한 모습이다. 저자는 역사가 일천한 아메리카 문명에 대해 먹물 특유의 비뚜름한 시선을 보이다가도 합중국이 보여주는 다채로운 매력에 빠진 듯한 분위기를 풍긴다. 책 제목에 쓰인 ‘Vertigo(현기증)’는 미국을 직접 돌아보며 느낀 그 자신의 느낌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그는 미국의 동부에서 서부로, 북부에서 남부로 갔다가 남북 캐롤라이나주, 버지니아주, 뉴잉글랜드주를 거쳐 다시 북쪽으로 갔다. 이 여정에서 때로 헬리콥터를 타기도 했으나, 대부분 자동차를 이용했다. 그는 여행자를 마술처럼 한순간에 이동시키는 비행기 여행을 하지 않고 자동차 여행을 한 것에 대한 자부를 내비친다. “자동차로 떠나는 이 길고도 아득한 여행, 시간과 공간상의 어떤 우연한 사건들과도 맞닥뜨릴 수 있는 이 여행은 여행자로 하여금 풍경들과 얼굴들의 유한성과 결합할 수 있게 해주는 유일의 양식인, 유한(有限)의 양식을 체험하게 한다.”

자동차 여행을 통해 그는 미국인들조차도 몰랐던 미국의 길을 발견했다고 자랑한다. “오리건주 경계에서 멕시코 국경까지 펼쳐진 101번 도로, 플로리다주에서 거꾸로 거슬러 올라갔던, 로버트 크레이머의 길인 1번 도로, 시에라네바다를 따라가는 49번 도로, ‘분노의 포도’의 망령들이 배회하고 있는 그랜드캐니언 서쪽 도로…….”

이 길 위에서 만난 숱한 사람들의 이야기는 무한(無限)의 상상력을 자극한다. 미국을 지탱하는 숱한 장삼이사(張三李四)와 부딪칠 수 있고, 또한 이름만 대면 알만한 인사를 꽤 많이 만날 수 있다. 이제는 한물 간 배우 샤론 스톤의 정치 발언, 2004년 당시 ‘검은 클린턴’의 느낌을 줬던 버락 오바마의 모습, 미국의 오만을 야유하는 작가 짐 해리슨의 폭소, 반전체주의 철학자처럼 말하는 조지 소로스의 지적 유희 등이 흥미롭다.

장재선 기자 jeijei@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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