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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여행작가로 불리는 빌 브라이슨은 여행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어쨌든 상관없다. 어차피 여행은 집으로 향하는 길이니까.” 여행은 흔히 ‘일상에서 벗어나는 설렘’이라거나 ‘일과 생존 투쟁의 제약을 받지 않는 삶이 어떤 것인지 보여준다’고 들 하지만 여행이 ‘일상’이 아니라 여행일 수 있는 것은 브라이슨의 말처럼 결국 집으로 돌아오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여행은 익숙한 곳을 떠나, 온갖 모험을 하고, 훌쩍 성장해 집으로 돌아오는 오랜 ‘성장 서사’의 짧은 버전이다.

추석 연휴, 공항은 여행객으로 붐비고 하늘을 나는 비행기표는 진짜 하늘의 별처럼 구하기가 힘들다지만 그래도 많은 이들은 귀성 귀경전을 치르고, 멀리 사는 가족과 마주 앉아 밥을 먹으며 오랜만에 식구(食口)가 된다. 그래서 이번주 북리뷰는 긴 연휴, 떠나고 싶은 이들을 위해 ‘책으로 떠나는 여행’으로 꾸몄다. 북리뷰 1, 2면은 기존에 나와 있는 여행 에세이, 소설들로 세계를 둘러봤고, 3면은 신간으로 천년고도 경주를 걷고, 유럽의 맛과 멋을 만났다. 책으로 떠나고, 그곳을 만끽하고, 다시 돌아오는 3페이지짜리 여행을 전한다.

알랭 드 보통 ‘여행의 기술’

우리는 왜 끊임없이 여행을 떠나고 싶어하는 것일까. 다른 일에는 회의적이고 신중하면서 왜 야자수와 에메랄드빛 바다 사진이 실린 팸플릿 한 장에 마음이 흔들리는 것일까. 문학과 철학과 역사를 아우르며 현대적 일상의 가치를 탐구해온 저자 알랭 드 보통. 그는 이렇게 흔들리는 마음을 ‘현혹’이라고 표현했다.

출간된 지 이제 10년 남짓이지만 ‘여행서의 고전’으로까지 평가되는 ‘여행의 기술’(청미래)은, 가계에 파탄을 일으킬 정도로 많은 돈이 드는 긴 여행이 ‘열대의 바람에 살짝 기울어진 야자나무 사진 한 장으로부터 시작될 수 있음’을 인정하며 저자가 바베이도스 섬으로 여행을 떠나는 것으로 시작한다.

저자의 책에서 펼쳐 보이는 여행에 대한 사유는 탁월하다. 늘 경험하면서도 모호하게 받아들인 감상을 직관과 사유를 통해 정리해낸다. 이를테면 이런 것들이다. 여행은 늘 기대를 전복한다. 떠나기 전에 상상했던 것은 당도하고 보면 기대와는 다르다. 팸플릿 속의 사진과 같은 이미지는 사라지고 없다. 왜 그런가. 저자는 여행지에서 만나야 할 소중한 것들은 현실보다 오히려 예술과 기대 속에서 더 쉽게 경험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기대감에 찬 상상력이 생략과 압축을 감행해 여행의 따분한 시간을 잘라내고, 곧바로 핵심적인 순간으로 이끌고 간다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여행을 통해 삶의 생동감과 일관성을 얻을 수 있다는 얘기다. 그러므로 ‘여행의 기술’이란 건 어떤 것을 축약하고, 또 어떤 것을 확대해서 보아야 할지, 또 어떤 것을 지워내고 어떤 것을 더 또렷하게 만들어야 할지를 가려내는 일에 다름아니라는 뜻이겠다.

먼저 ‘여행을 시작하는 장소’인 휴게소, 공항, 기차부터 시작한다. 저자는 이런 공간들을 여행자의 시선으로 들여다본다. 이 대목에서 감탄하는 건 유려한 문체와 예민한 내면의 생생한 묘사다. 어찌나 묘사가 세밀한지 문자가 흡사 붓처럼 그림을 그려낸다.

‘모든 주거지로부터 멀리 떨어져 고속도로 옆의 언덕에 자리잡은 외딴 휴게소’를 묘사하는 문장을 보자. “서쪽 하늘이 붉어지고 있었다. 건물 한쪽 옆에 한줄로 늘어선 장식용 나무들에서는 끊임없이 저음의 자동차 소리를 배경으로 새소리가 들렸다.…지평선에서는 구름이 피어올랐고, 풀이 덮인 둑너머로는 통근자들이 사는 도시의 불빛이 어른거렸고, 멀리 고가도로를 따라 차와 버스의 실루엣들이 밀려들었다.” 낯선 공간에 대한 이런 묘사는 저자가 매료됐던 야자나무 사진 한 장처럼 독자들에게 여행을 충동한다.

저자는 여행지의 풍경 속에서 자신의 감상을 끌어내고 이를 다시 예술가들의 작품과 삶과 연결시켜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휴게소의 나른한 풍경 속에서 저자는 작가 샤를 보들레르와 화가 에드워드 호퍼를 불러온다. 평생 여행을 꿈꾸며 길 위에 있고 싶어했던 보들레르의 행적을 쫓고 ‘집에서 멀리 떠나와 혼자있는 사람들’을 그려낸 호퍼의 그림을 펼쳐 보여준다.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스키폴 공항의 자음과 모음이 겹치는 낯선 표지판 문자에서 ‘이국적인 것’의 즐거움을 마주한 저자는 이번에는 귀스타프 플로베르를 끌어낸다. 평생 중동과 아시아, 아프리카를 동경하며 이국적인 것들에 매료됐던 플로베르의 여행 행로를 자신의 여행담과 교직해 철학과 문학적 사유로 이야기를 풀어낸다. 이런 식으로 ‘호기심’ ‘시골과 도시’ ‘아름다움의 소유’ ‘숭고함’ 등 여행에서 자주 만나게 되는 심상에 대한 이야기가 이어진다. 다시 처음의 질문. ‘우리는 왜 여행을 하는가’. 책은 이 질문에 대한 명쾌한 답보다, 이런 스스로에게 이런 질문을 던지도록 하는 쪽에 가깝다.

박경일 기자 parking@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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