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 실직했는데… 아이 가슴에 못박는 ‘부모직장 체험’

서울 강남구 압구정동 A 중학교에 다니는 2학년 딸을 둔 권모(여·45) 씨는 이번 여름방학 때 ‘학부모 직장체험’ 숙제로 골머리를 앓았다. 자신은 전업주부인 데다, 대기업 중견 간부였던 남편이 최근 반자발적으로 퇴직해 ‘실업자’ 신세가 된 까닭에 딸의 숙제를 도울 수 없었던 것이다. 부모 대신 친지나 지인의 도움을 받아 직장체험을 해도 된다고 해 결국 대기업에 다니는 친척의 도움으로 숙제를 해결했지만, 딸은 실업자가 된 아버지를 한동안 부끄러워하는 눈치였다.

권 씨는 “아이 엄마들 사이에서는 남편이 여전히 대기업에 다니는 잘나가는 회사원이었는데, 개학 뒤 방학숙제를 제출하고 나서 남편이 실직한 사실이 다 알려지게 됐다”며 “아이들 다수가 학교에서 서로 직장체험 보고서를 비교하고 자랑하는 통에 우리 애가 큰 상처를 받은 것 같다”고 분통을 터뜨렸다.

일부 초·중학교에서 여름방학 과제로 ‘학부모 직장체험’을 요구하고 있어 논란이 일고 있다. 학생의 직업·진로탐색을 어릴 때부터 시작하게 한다는 취지지만, 과제 내용으로 가정환경이나 생활수준을 짐작하게 해 어린 학생들 사이에 위화감을 조성하고 있다는 우려도 일고 있다.

대전 서구의 B 중학교 1학년 학생의 학부모 이모(여·42) 씨 역시 변변한 직업 없이 일용직을 전전하는 남편과, 청소부로 일하는 자신의 처지 때문에 아이가 이 방학숙제를 제대로 해가지 못한 것 같아 속상한 마음을 숨기지 못하고 있다. 이 씨는 “지인의 도움으로 과제를 마치긴 했지만, 자기 자식 일만큼 살뜰히 챙겨주기 힘들었을 것”이라며 “지금까지 청소부라는 직업에 자부심을 가지고 열심히 일을 해왔는데, 아이를 통해 다른 학부모의 직업을 들으니 내가 한없이 작아지는 기분이 든다”며 한숨을 쉬었다.

과제에서 해당 직업의 특성 외에 인터뷰 대상자의 이름과 직책을 요구하는 등 지나치게 자세한 신상을 요구하는 점도 문제다. 실제 전학년 공통과제로 수행된 B 중학교의 ‘직업체험 보고서’ 양식에는 인터뷰 대상자의 이름과 소속, 업무 내용, 직업 선택의 동기, 종사 기간, 학력이나 자격증 소지 여부 등을 서술하게 하고 있다. 신상 위주의 문항이 마치 ‘호구조사식’으로 이뤄져, 학부모들이 큰 부담을 느낀다는 지적이다.

장인홍 서울시 교육위원은 “진로탐색이라는 명분만 내세우고 교육 서비스의 수요자인 아이와 학부모의 입장을 전혀 배려하지 못하고 있다”며 “지방자치단체마다 진로직업체험센터를 만들어 각급 학교와 지역에 있는 기업을 연계해 다양한 직장체험을 하는 방안을 확대할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

이근평 기자 istandby4u@munhwa.com

문화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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