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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훈/한국영상자료원장

국제영상자료원연맹(FIAF)은 2008년 파리에서 총회를 갖고 ‘필름을 버리지 말자(Don’t Throw Film Away)’는 슬로건을 채택했다.

77개국 150여 영상자료원으로 구성된 FIAF 회원들은 디지털 기술이 고도로 발전한다 하더라도 필름을 지속적으로 수집하며 원본 상태로 보존할 것이며, 절대로 폐기해서는 안 된다는 내용의 선언이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영화 필름은 극장의 재개봉관이나 동시 상영관에서 상영을 마친 뒤에는 밀짚모자의 테두리로 사용되거나 용해 분리해 은을 추출하기 위해 폐기됐다. 한국영상자료원의 모태인 ‘필름보관소’가 영화진흥공사 소속으로 설립된 지 올해로 꼭 40년이 된다. 따라서 그 전에 제작된 한국영화의 보존율은 40%에도 미치지 못해 그동안 국내는 물론, 해외까지 뒤지며 국내 영화를 수집해 왔다.

최근 김수용 감독의 ‘저 하늘에도 슬픔이’(1965년작)를 대만 영상자료원에서 찾아왔고 그 전 해는 홍콩에서 최초의 한·홍합작영화 ‘이국정원’(1957년작)을 발굴했다.

그러나 아직까지 국내의 어딘가에 필름이 잊힌 채 방기돼 있을 것이며 또한 필름이 버려질 수도 있다는 불안감을 떨칠 수가 없다. 영화의 모든 환경이 필름 시대를 마무리하고 본격적인 디지털 환경으로 바뀌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국내에서의 영화 제작은 ‘설국열차’를 마지막으로 더 이상 필름으로 만들어지지 않고 있다. 올 상반기에 영상자료원에 제출된 국내 영화 104편도 모두 디지털로 제작된 것이고 필름은 한 편도 없었다. 그뿐만 아니라 국내 유일한 현상 업체로 남았던 서울현상소가 올 봄에 폐업해 필름으로 제작할 수 있는 환경도 사라졌다.

또한 국내 극장 시설도 급속도로 디지털 상영관으로 전환돼 이제 곧 영사기도 사라질 운명에 처해 있다. 영사기가 사라지면 당연히 필름은 빛을 볼 수 없게 되고 남아 있는 고전·예술영화 필름들은 시네마테크를 비롯한 소수의 전용 극장에서만 돌게 될 것으로 예상된다. 그래서 많은 전문가가 필름의 운명도 아날로그 기록 매체인 LP레코드판, 카세트 테이프, VHS 등과 같은 반열에 놓일 것으로 예측하고 있다.

음향 기록 매체는 일부 애호가들에 의해 그 존재 가치를 인정받으며 명맥이 유지되고 있지만 필름은 고화질과 편리성을 구현한 디지털 기기의 등장으로 살아남을 전망마저 비관적이다. 무엇보다 영사기나 스크린 등 재생기기의 규모나 투자비용이 이들 디지털 시스템과 크게 차이가 나 개인이 사적인 공간에서 필름으로 영화를 감상한다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영화 필름을 보존하고 활용할 수 있는 유일한 기관인 영상자료원은 앞으로 혹시 버려질지도 모를 필름을 찾기 위해 적극적인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소장가들의 기증도 최근 늘고 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개인이 보관해 온 필름은 대부분 오랜 기간 상온에서 관리됐기 때문에 초산화 현상, 백화 현상, 탈색, 수축 등 변질이 생겨서 복원하는 데 많은 어려움이 따른다.

필름은 지난 한 세기 동안 영상 보존을 위한 가장 안전한 매체로 검증됐다. 그러나 섭씨 0∼5도와 30% 정도의 습도를 유지시켜 관리해야만 영구적으로 보존할 수 있다. 따라서 인류 역사의 생생한 기록물임과 동시에 중요한 유형 자산이자 인간의 눈으로 읽을 수 있는 실체인 필름은 버려져서 안될 뿐 아니라 시급히 영구적인 전문 보존 시설에 보관돼야 한다. 독일의 무성영화 ‘메트로폴리스’(1927년작)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됐으며 국내 보존 영화 가운데서 가장 오래된 ‘청춘의 십자로’(1934년작)를 비롯한 8개 작품도 등록문화재로 보호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