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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연, 지연 따지기를 유난히도 좋아하는 한국인들은 심지어 낯선 외국에서 처음 만나도, 늘 상대방의 신상부터 조사하려고 든다.

“고향이 어디세요?”

고향의 첫 번째 사전적 의미는 ‘조상 대대로 살아온 곳’이다. ‘서울 서베이’ 보고서에 따르면, 가히 ‘특별시민’이라 할 수 있는, 3대 이상 대대로 서울에서 살아온 토박이는 전체의 4.9%에 불과하다고 한다. 결국, 대부분은 부모 혹은 본인 세대에 서울에 유입된 ‘외지인’인 셈이다. 그러나 서울에서 태어났거나(31%), 또는 태어나지는 않았지만, ‘살다 보니 고향같이 느껴진다’는 ‘보통시민’의 비율은 66.9%에 이른다. 고향의 또 다른 의미가 ‘자기가 태어나서 자란 곳’이니, 그 자격은 충분하다.

나 역시도 서울의 ‘보통시민’이다. 본적지는 따로 있지만, 어쩌다 찾는 그곳은 왠지 부모님의 고향이지 내 몫은 따로 없는 것 같다. 명절 때마다 어김없이 벌어진다는 귀성길 전쟁도 늘 남의 일이다. 굳이 따지자면, 동대문구 ‘지역 토박이’다. 지역 내에 있는 초·중·고교를, 그것도 모두 걸어서 다녔다. 오죽하면 그 시절, 내 소원이 대중교통편으로 학교 가는 것이었으랴. 대학도 결국 버스정류장을 기준으로 기껏 10여 개 떨어진 고려대를 다녔으니, 꿈을 이루었다고 말하기조차 민망하다. 대학원 시절까지 20대 내내, 그것도 같은 번호의 버스를 타고 그 길을 지나다녔다. 천천히 걸어도 채 한 시간이 안 걸리는 거리이니, 가끔은 산책 삼아 걷기도 했다. 바로 그 길이 고려대역(6호선)과 회기역(1호선과 중앙선) 사이를 연결하는 회기로(回基路)이다. 이 도로명도 중요 통과 지역인 회기동, 청량리동, 휘경동 중에서, 대충 하나를 골라 이름붙인 듯하다. 결국, 회기로가 시작되고 지나는 동네가 내가 ‘자란 고향’이다.

흔히 ‘홍릉수목원 길’이라 불리는, 산책하기 좋은 가로수 길은 사실 회기로의 앞 구간에 해당하며 국방연구원, 과학기술연구원, 농촌경제연구원 등 10여 개의 정부산하 연구원들이 밀집된 한적한 지역을 통과한다. 서울시에서 ‘가을의 걷고 싶은 길’로 선정해서 그런지, 가을에는 한동안 보도에 낙엽이 쌓이도록 치우지 않고 그냥 둔다고 한다.

주말에도 그 길을 찾는다. 산책 삼아 동네 주변을 어슬렁거리는 것이니, 별다른 준비야 필요 없지만 ‘홍릉 숲’이 주말에만 개방하기 때문이다. 고려대역 3번 출구를 나와 오른쪽 길로 들어서면, 이미 회기로는 시작된다. 조금 걷다 보면, 산림과학원과 세종대왕기념관이 보이는 삼거리가 나온다.

별다른 이정표는 없지만, 나무로 만든 간판과 오두막 같은 멋진 안내실만 보아도 금방 눈치챌 수 있다. 입구를 지나 몇 걸음 걸었을 뿐인데, 벌써 공기의 맛이 달다. 서울 시내에 이런 울창한 숲이 있다는 것이 늘 놀랍고 고마울 뿐이다. 이제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며 걷는다. 익히 알던 나무는 그 이름을 확인하고, 처음 보는 수종은 감탄하며 쳐다본다. 토종 식물은 참 예쁜 한글 이름을 가진 것이 많다. 몇 개쯤 새로 외워본다. ‘에코-힐링’, 산림욕 운운할 것도 없다. 그저 맑은 공기 가득한 숲에서 여유롭게 쉬면서, 고민은 내려놓고, 희망을 가득 채워, 기분 좋아져서 돌아오면 그만이다. 유독 마음에 드는 나무가 있거든, 남몰래 한 그루쯤 점찍어 두는 것도 좋다. 그러면 늘 그 자리에서 나를 기다리는 듬직한 친구 하나 사귄 셈이고, 보고 싶은 마음에 곧 다시 올 테니 말이다.

유모차를 끌고 나들이 나온 가족들이 많이 보이고, 두 손 꼭 잡고 나란히 걷는 연인들도 보인다. 최근에는 꽃과 나무를 사진에 담기 위해 오는 사람이 부쩍 늘었다. 홍릉 숲이 이제는 많이 알려졌지만, 뜻밖에 찾는 사람은 아직 많지 않으니, 나로서는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다.

홍릉 숲에 한 번 왔다고, 어디 가서 아는 척하지는 말자. 계절마다 한 번씩은 와봐야 한다. 봄에 처음 왔다면 꽃피는 수목원을 본 것이고, 가을이라면 단풍 곱게 물든 숲을 본 것뿐이다. 혹시 내게 어느 계절이 가장 좋았냐고 묻는다면, 글쎄다, 봄비 내리던 어느 오후라고 해야 하나. 비안개 짙게 피어 오르며, 이슬비가 꽃비 되어 내리는 풍경은 신비롭기까지 하다. 넋놓고 바라보다, 뒷걱정하지 않고 그만 우산을 접어버렸다.

세종대왕기념관에 대해 쓴소리를 한바탕 하고 싶지만 한글날도 다시 공휴일로 지정됐으니, 차차 나아질 것이라는 희망에 또다시 참아본다. 그 훌륭한 유물들을 아직도 그런 고루한 방식으로 전시하고 있다니, 실망을 넘어 부끄럽기까지 하다. 우선 길 건너 산림과학관에서, 전시 방법부터 배우기 바란다. 주인과 손님이 바뀌어도 분수가 있지, 재정 문제에 전통혼례 운운해도 다 구차한 변명에 불과하다. 심지어 멀쩡한 한글 두고 ‘웨딩홀’은 무엇인가. ‘홍릉 삼거리’라고 불렸던 예전 명칭도 이젠 ‘세종대왕기념관 삼거리’라고 정해졌다니, 제발 그 이름값 좀 하기 바란다.

기념관 정면에서 근처에 있는 영휘원의 능이 보인다. 어쩌면 ‘홍릉’이란 명칭에 가장 어울리는 장소이며, 그래서 아직도 잘못 부르는 경우가 많다. 시간이 허락한다면 둘러보는 것도 좋다. 개인적으로는 초등학교 무렵 봄, 가을로 어김없이 소풍 가던 장소라서 그런지, 그때 싫었던 마음이 지금도 영 가시질 않는다.

가로수 그늘 짙게 드리워진, 나머지 홍릉 수목원 길을 따라 산책을 이어간다. 조금씩 주변 분위기가 변해간다. 흔히 ‘경희대 앞’이라고 불리는 지역은 한때는 아주 번화한 대학가였다. 한국외대와 서울시립대도 지척에 있고, 주변 초·중·고교의 경우는 죄다 열거하기도 힘들 지경이며, 거기에 대형병원마저 혼잡함에 단단히 한몫했다. 하지만 너무 일찍부터 유명해져 버린 곳이라 그런지 요즘 새롭게 떠오르는 다른 ‘대학교 앞’에 비해 상대적으로 위축되어 보인다. 또 오랫동안 대학가와 일반주거지가 뒤섞여 있다 보니, 결국 어느 쪽으로도 발전하지 못했다. 현재는 ‘재정비촉진지구’로 지정되어, 조만간 큰 변화를 예고하고 있다.

홍릉 수목원 길과 맺은 인연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아직도, 이젠 273번으로 번호가 바뀐 버스를 타고 강의를 위해 지나간다. 혹시라도 중간에 내려 걷자면, 그 방법이 낫다. 심지어 이사해도, 그 노선을 벗어나지 못한다. 하긴 무슨 질긴 우연인지, 유학 시절 파리의 대학 앞에도 같은 번호의 버스가 있어, 부질없는 향수병에 시달리곤 했다. 다시 계절이 바뀌어도, 어김없이 그 길 위에 쌓인 낙엽을 밟으며 집에 돌아가리라. 고향의 마지막 의미는 ‘마음속에 깊이 간직한 그립고 정든 곳’이다. 문득 보니, 회기로는 한자로 ‘돌아올 회(回), 터 기(基)’를 쓴다. ‘늘 되돌아오는 곳’이란 뜻일 테다.

고려대 강사·파리 CRLPC 객원 연구원

이미지 크게보기 서울 동대문구 회기로에 인접한 산림과학원 홍릉수목원 앞 인도를 사람들이 걸어가고 있다. 심만수 기자 panfocus@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