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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만 원 세대’와 ‘3포 세대’에 이어 ‘5포 세대’라는 단어까지 등장했다. 연애, 결혼, 출산은 물론 인간관계와 내 집 마련의 꿈까지 포기해야 한다는 의미의 5포 세대는 지금 우리 시대 청년의 실상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KBS 2TV 미니시리즈 ‘트로트의 연인’은 5포 세대의 애환과 로맨스를 구성진 트로트 가락으로 풀어낸 드라마다. 대중성과 음악성을 겸비한 최고의 스타 아티스트 장준현(지현우)과 시장에서 반찬을 팔았던 엄마를 도우면서 트로트를 들으며 자란 최춘희(정은지)의 성장담이 경쾌하게 펼쳐진다. 모든 음악 장르를 좋아하고 사랑하지만 트로트만큼은 끔찍하게 싫어하는 장준현이 음악적으로 재기하기 위해 악보조차 제대로 볼 줄 모르는 최춘희를 최고의 트로트 가수로 만들어야 하는 극적 상황 속에 5포 세대의 비루한 현실이 담겨 있다.

그러나 이 드라마는 비현실적으로 보일 만큼 참담한 현실을 달콤하게 버무려낸다. 장준현은 전 소속사 대표의 음모 때문에 잘 나가던 아티스트에서 천덕꾸러기 신세로 전락하고, 최춘희는 사채를 써가면서까지 차린 편의점이 망하자 연락을 끊고 잠적한 아버지 대신 사채업자에게 시달리면서도 어린 동생을 보살피며 유통기한 지난 삼각김밥으로 끼니를 해결한다. 하지만 장준현과 최춘희의 비루한 현실은 이들의 로맨스에 가려진다. 음악의 신이라는 소리까지 듣던 장준현이 룸살롱에서 기타 반주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느끼는 참담함이나, 평범하게 살아가던 최춘희가 밤무대 가수가 돼 취객에게 봉변당하는 낭패감은 로맨스의 당도를 높이기 위한 설정일 뿐이다.

장준현은 비록 스캔들 때문에 한순간에 나락으로 떨어졌지만 5포 세대는 아니다. 그의 존재감은 5포 세대를 상징하는 최춘희와 결합될 때 발휘된다. 제아무리 노력해도 혼자 힘으로는 탈출구를 찾지 못해 정치·경제적이나 사회·문화적으로 옴짝달싹 못하던 최춘희에게 그는 백마를 잃어버렸으나 태생은 왕자였기 때문이다. 조작된 스캔들로 순식간에 나락으로 떨어진 장준현과 타고난 감각으로 트로트 리메이크 음반을 성공시키는 최춘희의 로맨스가 현실적인 것 같지만, 결국 판타지로 향하는 것도 그래서이다.

대형 연예기획사의 젊은 사장 조근우(신성록)와 장준현을 대비시키고, 스타 가수로서의 미래가 보장된 박수인(이세영)과 최춘희의 갈등을 고조시키는 것도 로맨틱코미디의 장르 문법을 충실하게 따른 결과이다. 든든한 배경이나 돈이 없어 무시당하던 최춘희의 숨겨진 능력을 포착하고 적극 지원하다가 그녀를 사랑하게 된 조근우, 모든 걸 가지고 있으면서도 더 많은 걸 얻기 위해 몸부림치다 아무 것도 갖지 못한 채 최춘희에게 자신의 모든 걸 빼앗겼다고 질투하는 박수인이 없었다면 ‘트로트의 연인’은 유치한 드라마라는 낙인을 피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장르드라마 문법에 충실한 것은 시청자의 기대치를 충족시켜주기도 하지만, 진부함과 상투성에 함몰되기도 한다. 이 드라마에 대한 시청자의 호불호가 갈리는 것도 그래서다. 하지만 20대 청년들의 비루한 현실을 잠시라도 잊게 해주는 것만으로도 ‘트로트의 연인’은 건강한 드라마다.

‘고개고개 넘어가도 또 한 고개 남았네/넘어 가도 넘어 가도 끝이 없는 고갯길/세상살이가 인생살이가 고추보다 맵다 매워’라는 최춘희의 노래 ‘고추’가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었던 것도 무엇 하나 쉽게 넘어가지 않는 인생의 본질을 포착한 가사가 흥겨운 가락에 실려 있기 때문이다. 다만 서글픔이 깃든 웃음 끝에 힘든 현실을 타개할 수 있는 열정을 확인하기 어려운 것이 아쉬울 따름이다.

충남대 교수·드라마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