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면 1

1938년 9월 하순 어느 날 오후 중국 허베이(河北) 야오산(堯山)성 부근. 일본군 순찰대가 스물다섯 살가량의 여인이 서너 살쯤 된 여자 아이를 안고 가는 것을 발견한다. 부하의 보고에 상관의 냉혹한 명령이 떨어진다. “아직 시에 남아 있다면 적 또는 적의 가족이다.” 이어지는 총성…. 여인이 쓰러지고 아이가 자지러지듯 운다. 잠시 뒤 아이의 울음이 갑자기 그친다. 여인의 곁에 쓰러진 아이의 가슴엔 아이 키보다 큰 창이 꽂혀 있다.


# 장면 2

1945년 4월 헤이룽장(黑龍江) 일본군 기지 위 상공. ‘푸르릉~푸릉’ 멀리서 폭격기가 기지 위로 날아온다. 150m 상공에 이르자 ‘반짝’ 무엇인가를 떨어뜨린다. 기지 지상에는 4개의 기둥이 있고 기둥마다 한 사람씩 묶여 있다. 떨어진 것은 탄저균이 든 폭탄이었다. 폭탄이 터지자 연기가 기둥을 덮는다. 잠시 뒤 묶여 있는 사람들의 온몸에 수포가 생기고 고통에 몸부림친다. 600m가량 떨어진 곳, 방호복을 입은 일본 장교가 이 장면을 빼놓지 않고 기록한다.

2차 대전 일본군 전범들이 남긴 자술서의 장면들이다. 중국 당국은 지난 3일부터 2차 대전 당시 일본 전범의 자술서를 공개하고 있다. 장면 1의 냉혹한 상관은 전범 기쿠치 슈이치(菊地修一)다. 지난 14일 그의 자술서가 공개됐다.

사카키바라 히데오(？w原秀夫)는 장면 2에서 방호복을 입었던 인물이다. 그의 자술서는 지난 10일 공개됐다. 16일 현재 자술서가 공개된 일본 전범 수는 총 14명이다. 어떤 자술서는 B4용지 서너 장 분량에 그치고 어떤 자술서는 열 장이 넘을 정도로 길다. 어떤 이는 장교, 어떤 이는 보병이었다. 신분도 지은 죄도 크게 다르지만 한 가지 공통점은 내용이 ‘참혹하다’는 점이다. 전범들의 자술서는 소설보다 더 극적으로 일본 군국주의를 고발하고 있다.

중국 당국의 공개는 오는 8월 16일까지 이어진다. 총 45명 전범의 자술서가 인터넷(http：//china.huanqiu.com/special/ribenZFhzigong/index.html)에 공개될 예정이다. ‘45명’의 함의도 깊다. 일본이 패전한 해인 1945년의 끝자리다. 공개 일정도 일본이 패전한 15, 16일 끝나도록 배려했다.

사진과 함께 영문 번역, 상세하게 신분을 공개하는 배려까지 중국 당국의 의도는 명확하다. 현 일본의 우경화, 재무장에 대한 세계인의 경각심을 높이려는 것이다. 현재까지 그 효과가 실제로 적지 않아 보인다.

일본군 고위 장교들의 자술서는 집단적인 만행을 잘 증언하고 있다. 후지타 시게루(藤田茂)는 1938년 육군 연대장으로 중국 침략전쟁에 참여해 1945년 3월 제43군 제59사단 중장으로 사단장까지 역임했다. 그는 1938년 8월 산시(山西)성에서 주민 6명을 체포해 고문·구타 등의 방법으로 살해한 것을 시작으로 1945년 3월 27일 약 50가구가 있는 덩(鄧)현 지역에서 노인, 부녀, 어린이 등 주민을 한곳에 모아놓고 살해했다.

“살인은 군인이 전쟁에 익숙해지고 용기를 키울 수 있는 빠른 방법이다.” 바로 1939년 후지타가 남긴 말이다. 그는 같은 해 포로 17명을 1, 2중대 ‘총검술 교재’로 제공해 살해토록 지시했다. 또 1945년 6월 지난(濟南) 지역에서도 진지 구축에 동원해오던 600명 이상의 포로를 ‘총검술 교재’로 희생시켰다고 자백했다.

스즈키 게이쿠(鈴木啓久) 역시 1934년 중국 동북 지역에서 보병 제28연대 연대장 보좌역으로 전쟁에 참여해 1945년 육군 중장으로 제117사단장을 역임했다. “내 기억으로는 5470명의 중국인을 살해했고 1만8229채의 주택을 파괴했다. 아마도 실제 숫자는 더욱 많을 것”이란 말을 남긴 그는 전쟁 속에서 한 인간이 얼마나 잔학해질 수 있는지 보여준다. 그는 또 안후이(安徽)성의 한 가옥에 숨어 있던 약 50명의 항일 군인을 “독가스를 이용해 참살했다”는 진술을 비롯, “임신부 배를 갈랐다” “마을에 콜레라균을 퍼트렸다” “‘공기주입 살인’을 실험했다” “생매장 등을 통해 집단 학살했다” 등의 끔찍한 범죄들을 자백했다.

장면 2의 주인공 사카키바라는 일본 731부대 산하 부대 지휘관으로 세균전 준비상황을 자백하고 있다. 그는 세균 배양을 위해 1945년 4월부터 7월까지 총 2만6000마리의 쥐를 잡아 731부대로 보냈다. 또 우물에 풀면 동북지역 일대 소련군을 대량 학살할 수 있는 장티푸스균 등을 보관하고 이 세균의 독성을 확인하기 위해 민간인 4명을 붙잡아 실험하기도 했다.

장면 2에 묘사된 것은 1945년 4월 실시된 도자기형 세균 폭탄 실험 현장이다. 또 다른 전범 도미나가 준타로(富永順太郞)는 일본 군국주의가 당시 모든 국력을 총동원했음을 보여준다. 그는 1926년 일본의 괴뢰 정부인 만주국 내무부에 근무하다 1939년 6월 이후 화북교통주식회사에서 과장으로 활동했다.

도미나가는 1941년 12월 이후 국영기업 간부는 자연스럽게 간첩활동을 겸직해야 했다고 자백했다. 지난 16일 자술서가 공개된 전범 스미오카 기이치(住剛義一)는 보병 교관이었다. 그는 자술서에 “1942년 7월 타이위안(太原)시에 주둔할 때 포로 220여 명을 산 채로 과녁으로 만들어 일본군 1명당 포로 1명씩을 살해하도록 했다”고 적었다.

자술서 공개를 앞둔 전범 수는 31명이다. 어떤 참혹한 기록이 또 세상에 드러날지 주목된다.

베이징 = 박선호 특파원 shpark@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