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 민/정치부장

‘외교’란 일국의 독자적 생존공간을 확대해나가는 기술이다. 독자적 생존공간의 확대는 곧 영향력의 확대다. 남이 내 말에 귀 기울이고 궁극에는 나를 필요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외교 행위의 토대는 ‘국익’이어야 한다. 외교가 여론만 살피고 국민정서에 의해 좌지우지될 때 포퓰리즘으로 빠지게 된다. 여론은 의도하지는 않더라도 독(毒)을 품는 경우가 적지 않다.

최근 주철기 청와대 외교안보수석이 박근혜 대통령과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의 한·중 정상회담 및 특별오찬 등에서 나온, 일본의 우경화와 역사 왜곡에 대한 비분강개가 그대로 드러나는 비공개 대화 내용을 샅샅이 공개한 것은 국익에 부합하지 않는다. 정상회담에서 제3국과 관련해 나눈 대화는 비공개로 하는 게 상식이다. 상대국과의 신뢰가 깨질 수 있기 때문이다. 주 수석은 외교관례를 무시했다. 주 수석의 이번 공개는 한·중 정상회담 공동성명에 대일 공동 메시지가 없었던 것에 대한 국내 불만 여론을 의식한 것으로 드러났다. 국익의 관점이 아닌 여론에 따라 외교를 한 셈이다.

전략적 사고가 아닌 즉흥성에 기초한 여론외교가 초래하는 결과는 이렇다. 무엇보다 한·중 정상회담 공동성명에서 보여줬던 외교적 절제 노력이 빛을 잃었다. 일본은 미국을 향해 ‘한국의 중국 경도(傾倒)’가 사실로 드러났다고 목소리를 높일 것이다. 미국은 중국의 동북아 전략에 한국이 맞장구를 치고 있다는 우려를 갖는다. 워싱턴 외교가에서는 ‘한국이 중국 주도 아시아 신 경제질서의 전초기지화할지 모른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북한은 심사가 뒤틀린 일본과의 접근을 가속화한다. 북핵을 저지하기 위한 한·미·일 안보연대에는 균열이 생긴다. 중국과는 ‘정열(政熱)’의 관계로 나아갈지 모르지만, 미·일과는 ‘정냉(政冷)’의 길을 재촉한다….

여론과 국익이 상반된다고 판단될 때는 주저없이 국익을 선택해야 한다. 그건 리더십의 덕목이다. 대한민국의 가장 중요한 국익은 한·미 동맹을 바탕으로 안보를 굳건히 하는 것이다. 국익의 최대 저해 요인은 동북아 역내(域內) 패권세력의 등장이다. 천영우 전 청와대 외교안보수석은 “한말(韓末), 서구 열강의 침탈을 경험했던 한국은 광복 후 미국이라는 역외(域外) 균형자와 손잡고 역내 세력균형을 회복하는 기회를 갖게 됐다”며 “이후 국력이 커지면서 우리 운명의 고삐를 우리 스스로 쥐는 기회를 만들어낸 것이 지난 1세기 동안의 가장 큰 변화였다”고 분석했다. 이걸 지키는 게 국익이다.

동북아 새 질서 주도를 꿈꾸는 중국의 국익은 다르다. 한국을 미·일로부터 멀어지게 하고 자기 쪽으로 접근시키는 것을 주요 목표로 하고 있을 것이다. 시 주석의 방한 기간에 우리는 중국과의 경제 교류·협력을 강화하면서도 그들의 동북아 전략에 말려들어가지 않는 외교적 명민함을 발휘했어야 했다. 주변 강국들이 우리를 필요로 하게 만들고, 대한민국의 독자적 생존공간을 확대하는 기회로 삼았어야 했다. 반일정서라는 여론만 좇다가는 어느 순간 중국의 전략에 말려들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지 모른다. 그게 여론외교의 독이고 함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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