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크게보기 잡지 ‘별건곤’ 1927년 1월호에 실린 삽화. 학교 옆을 지나가는 여학생을 남학생들이 희롱하는 모습을 담았다. 당시는 여성이 희롱을 당해도 다 이유가 있다며 도리어 여성을 꾸짖는 일이 잦았다. 민음사 제공

경성고민상담소 / 전봉관 지음 / 민음사

마산의 여학교 4학년생인 A(18) 양은 3년 전 근처 남학교에 다니는 K 군과 졸업 후 결혼하기로 약속했다. 그녀는 두 달 전 영화관에 갔다 우연히 약혼자 K 군을 만났고, 영화 관람 후 어두컴컴한 중국 요릿집 방에 들어가 밤참을 먹게 됐다. 그런데 이 자리에서 K 군이 A 양을 성폭행했다. A 양은 힘껏 뿌리쳤지만 K 군의 힘을 당해낼 수 없었다. 일명 ‘데이트 폭력’이 자행된 것이다. 더구나 K 군은 한 달 후 약혼을 취소해버렸다. 사정을 모르는 A 양의 부모님은 순순히 허락했다. 이에 A 양은 부모에게 성폭행 사실을 알려야 할지, 덮어두고 다른 남자와 결혼해야 할지 ‘어찌하리까’에 물었다.

이에 대한 ‘어찌하리까’의 대답은 요약하자면 이렇다. “아직 어린 처녀로서 아무리 약혼한 남자라고 할지라도 늦은 밤 요릿집 같은 데를 함께 들어간 것이 잘못입니다. 젊은 날 흥분되기 쉬운 기분에 끌려 일생을 그르칠 행동에까지 이른 것은 실로 유감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이제 다시는 그러한 일이 없도록 특별히 조심하여야 하고, 구태여 부모에게 말할 필요는 없습니다. 낙심하지 마시고 이후 수양에 정진하십쇼.”

이 당황스럽고, 어이없는 상담내용의 출처는 어느 ‘모자란’ 인터넷 마초(macho)사이트가 아니다. 1930년대 조선일보 독자문답란 ‘어찌하리까’에 담긴 실제 내용이다. ‘어찌하리까’는 1931년 9월 18일부터 1940년 3월 27일까지 조선일보에 연재된 코너로 독자가 자신의 고민을 편지에 적어 신문사에 보내면 기자나 사회 저명인사, 해당 분야 전문가가 상담해주는 형식이었다.

사례로 든 사연의 답은 변호사 신태악이 한 것이다. 신태악은 당시 3·1운동에 학생 대표로 참가해 6개월간 옥고를 치렀고, 신간회 재건을 위해 활약하는 등 사회적 명망이 높은 이었다. 하지만 그마저도 오늘날의 상식으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답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남성 중심적 시각이 잔존했던 시대적 상황을 그대로 보여준다.

당시는 간통과 강간의 구분도 없어 강간 당한 아내를 ‘간통한’ 아내로 표현하며 버려야 하는 것인가 묻고, 이에 대해 “도덕상 용서할 수 없지만 재발 방지 맹세를 받고 잊어야 도량 있는 남자’라는 식의 답변이 나오기도 한다.

‘황금광 시대’ ‘경성 자살 클럽’ ‘경성기담’ 등을 통해 근대문화에 천착해온 전봉관 카이스트 교수가 쓴 책은 ‘어찌하리까’의 문답 등 당시 신문과 잡지에서 성행했던 고민상담 코너의 내용을 담고 있다. 연애, 성, 가족 등 숨기고 싶은 사생활에 대한 내용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구하기 어려운 이런 ‘사생활의 기록’으로 시대의 상황을 정확하게 그려낼 수 있다는 것이 저자의 생각이다.

책에 담긴 사연들은 말 그대로 ‘가관’이다. 잦은 폭력으로 병상에 누운 아내를 강제 퇴원시키고 그 돈으로 오입질하는 남편, 처제를 임신시키고도 자살하라 명하는 형부, 조혼(早婚)으로 결혼해 자식 셋을 남기고 당당하게 신여성과 연애하는 남편 등 ‘나쁜 남자의 전성시대’다. 특히 조혼한 남편의 바람은 흔한 일이어서 기자가 “조혼한 아내와 이혼하겠다는 사연을 보내지 말아달라”고 부탁할 정도였다. 이와 함께 공부한 신여성이 유부남과 바람이 나거나 첩이 되는 일도 적지 않았다. ‘제2부인’이란 말까지 나올 정도였다.

이처럼 1930년대는 조혼, 축첩, 가부장제 등 구시대 인습과 자유연애, 연애지상주의, 남녀평등 등 서구에서 도입된 신문화가 혼재된 혼란의 시기였다. 새로운 규범이 아직 확립되지 않고, 전 규범과 충돌하는 전형적인 아노미(anomie)의 상태였던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남성들이 축첩을 일삼거나 성희롱을 하는 것을 묵인하고 여성들도 정조 관념을 당연시했으나 이때는 이에 대한 의문과 고민이 터져 나온다. 특히 며느리들이 시부모의 학대를 견뎌야 하는가를 묻는 질문은 새로운 변화였다. 과거에는 구타, 술주정 등이 반복돼도 시부모의 말을 따랐지만, 이제 이혼을 해야 하는지 묻는 때가 된 것이다. 물론 이에 대한 기자 등의 답은 “먼저 자신을 돌아보라”는 것이지만 말이다.

또 책에서는 동성애에 대해 관대했던 사회적 분위기도 살필 수 있다. 잡지 ‘별건곤’에서 동성애에 대한 고민을 털어놓는 독자에게 중외일보 기자 황신덕과 산부인과 의사 허영숙 등 여류명사들은 각각 “여학생 시절에 동성연애를 안 해 본 사람은 별로 없을 것입니다”, “열네다섯 살 때 진명여학교를 다니면서 동성연애를 많이 했습니다”며 자신의 경험을 술술 말한다.

저자는 이런 신문 고민상담코너를 통해 기성세대들이 신세대들에게 성적으로 타락했다는 비난을 하는 것은 ‘난센스’라고 말한다. 근대 이후 성적 개방도는 크게 변하지 않았고 오히려 허용되는 성과 허용될 수 없는 성을 규정하는 성윤리가 점차 확립돼가고 있다는 것이다. 1930년대 성과 연애에 대한 젊은이들의 고민에서 현재와의 차이점을 찾아보는 일은 꽤 흥미롭다.

유민환 기자 yoogiza@munhwa.com

이미지 크게보기 잡지 ‘여성’ 1937년 7월호에 담긴 여학생 스케치. 1930년대 여학생 사이에서는 동성애가 유행했고, 이에 대한 사회적 편견이나 금기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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