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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한중 지식인의 문예공화국 / 정민 지음 / 문학동네


책 제목이 길다. 부제는 더 길다.
‘하버드 옌칭도서관에서 만난 후지쓰카 컬렉션.’
긴 제목을 지닌 책답게 분량도 만만찮다. 718쪽.
장정본이어서 책을 손에 들면 묵직하다.
막상 책을 읽기 시작하자 이 묵직함이 경쾌함으로 바뀌었다.
긴 호흡으로 읽어야 할 책인 줄 안 사람은 실망할 수도 있겠다.
흥미로운 소설처럼 단숨에 읽힌다.
18세기 조선과 중국 청나라 지식인들의 교류를 다룬 이야기가 생생하게 살아 숨쉬기 때문이다.
인문학의 대중적 글쓰기로 유명한 정민(국문학) 한양대 교수의 입담도 경쾌한 독서를 돕는다.


‘문예공화국’은 17∼18세기 유럽 각국 인문학자들이 라틴어로 소통하던 지적 공동체를 이르는 말이다. 이 책의 제목은 18세기 조선 지식인들이 연행사(燕行使)로 갔던 청나라에서 그곳 지식인들과 공동 문어(文語)인 한문으로 소통하면서 동아시아의 문예공화국을 이뤘다는 것을 뜻한다. 부제에서 나타난 ‘후지쓰카 컬렉션’은 후지쓰카 지카시(藤塚隣·1879∼1948)라는 일본 학자가 모은 장서라는 의미다. 후지쓰카는 일제강점기 경성제국대학 교수를 지냈던 인물로, 청조의 학술과 문예가 어떻게 조선으로 전해졌는지를 평생 연구했다. 그는 관련 연구를 위해 엄청난 양의 서적을 중국과 조선에서 수집했다. 그의 아들인 후지쓰카 아키나오(藤塚明直)는 전후 일본에서 생계를 위해 선친의 책들을 꽤 많이 처분했고, 그 책들의 일부가 미국 하버드 옌칭(燕京)연구소의 부속기관인 옌칭도서관으로 흘러들어갔다.

동아시아 관련 고서가 많기로 유명한 옌칭도서관은 동양학을 공부하는 학자라면 꼭 가보고 싶어하는 곳. 2012년 방문학자로 옌칭연구소를 찾은 정민 교수는 우연히 후지쓰카 컬렉션이 이곳에서 60여년간 잠들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고, 그것을 한 권 한 권 찾아내며 조선과 중국 지식인들의 교류를 복원한다.

이 책의 이야기는 두 축으로 펼쳐진다. 하나는 저자가 옌칭에서 후지쓰카 컬렉션 속의 책들을 찾아내며 그 책의 의미를 탐색하는 과정이다. 다른 축은 1765년 숙부 홍억(洪檍)의 자제군관 자격으로 베이징(北京)에 간 담헌(湛軒) 홍대용(洪大容·1731∼1783)으로부터 시작된 조선 지식인들과 청나라 선비들의 우정과 소통의 내용을 전하는 것이다.

홍대용은 한족 지식인인 엄성(嚴誠·1732∼1767), 육비(陸飛·1719∼?), 반정균(潘庭筠·1742∼?) 등과 우연히 만나 사귀며 ‘천애지기(天涯知己·멀리 떨어져서도 애틋하게 그리워하는 우정)’를 맺었다. 책은 특히 홍대용과 엄성의 평생에 걸친 우정을 상세히 묘사하고 있는데, 두 사람의 소통이 18세기 한·중 지식인 문예공화국의 주춧돌을 놓았다는 것이 저자의 설명이다.

북학파 4대가인 이덕무(李德懋·1741∼1793), 박제가(朴齊家·1750∼1805), 이서구(李書九·1754∼1825), 유득공(柳得恭·1748∼1807) 등이 당대의 중국 선비들과 교류하며 홍대용의 길을 이어간다. 특히 박제가는 1790년의 연행에서 빼어난 시와 글씨 솜씨로 중국 문인들을 매료시킨다. 그가 가는 곳마다 글씨를 청하는 사람들이 줄을 섰다고 한다. 당시 베이징에서는 박제가로부터 시 한 수쯤 받지 못하면 예단(藝壇)에 명함도 내밀지 못할 정도의 분위기였다고 하니 요즘 말로 하면 ‘스타 학자’였던 셈이다. 박제가의 활약은 후일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1786∼1856)가 베이징에서 당대의 내로라하는 중국 학자들로부터 융숭한 대접을 받는 바탕이 된다.

컬렉션의 주인공 후지쓰카는 추사 연구의 대가이기도 하다. 그는 추사에 관한 각종 자료를 모으는 데 골몰했는데, 그 중에 국보급 문화재인 세한도(歲寒圖)가 있다. 후지쓰카는 이 세한도를 목숨처럼 아꼈으나 한국인 수집가이자 서예가인 손재형(孫在馨·1903∼1981)이 90일간 매일 찾아와 돌려달라고 간청하자 “오래 간직하리라 믿는다”며 돈을 받지 않고 내줬다. 손재형은 나중에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했다가 선거 자금이 달리자 이 그림을 맡기고 돈을 빌렸고, 그 돈을 갚지 못해 그림은 다른 사람의 소유가 됐다고 하니 저자의 말마따나 한국인으로서 부끄러울 뿐이다.

스스로를 드러내는 성품이 아닌 탓에 일본 학계에서 후지쓰카의 명성은 높지 않았다. 그러나 정민 교수는 그가 소장했던 책 속에 메모해 놓은 것만 봐도 큰 학문적 성과를 이루고 있다고 평가한다. “책 속에 남은 후지쓰카의 메모는 모두 한 방향을 정확하게 가리키고 있었다. 한·중 지식인의 문화 학술 교류의 현장이었다. 그의 그 많은 메모를 살펴보니 실제 그가 자신의 연구에서 직접 활용한 것보다는 정리만 해놓고 미처 글로 쓰지 못한 내용이 훨씬 더 많았다. 같은 주제를 가지고 쓴 최근 우리 쪽의 논문을 읽어보면 그의 메모 수준에 크게 미치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가 80년 전에 이미 줄긋고 메모하고 정리해둔 내용을 최근의 논문들이 오히려 따라잡지 못하고 있었다. 그의 책은 보면 볼수록 읽는 사람을 왜소하게 만들었다. 마치 부처님 손바닥 안에 든 손오공이 된 듯한 느낌이었다.”

후지쓰카가 경성제대 교수로 재직하던 시절에 일본 학자들은 “송명(宋明)의 찌꺼기 같은 학문을 빼고 나면 조선 500년 문화에는 남는 게 없다”며 대놓고 조선을 무시했다. 후지쓰카는 18세기 조선 지식인들이 청나라 선비들과 교류한 흔적을 찾아 홀로 공부하며 그렇지 않다는 증거를 남겨 놓은 것이다. 그 증거의 장서가 미국 옌칭으로 흘러가 60여 년 잠들어 있던 중에 한국의 인문학자에 의해 잠이 깼다는 사실! 시대와 공간을 뛰어넘는 소통의 광휘(光輝)가 여기에 있다.

이런 감격을 방해하는 것은,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위해 동아시아의 상생과 화해에 어깃장을 놓은 아베 신조(安倍晋三)류의 행태다. 21세기 동아시아 문예공화국이 출현해 아베 따위의 정치적 옥셈을 제압할 수 있기를 바라게 된다.

장재선 기자 jeijei@munhwa.com

이미지 크게보기 미국 하버드 옌칭도서관에 있는 박제가, 유득공, 이덕무 관련 시문집들. 일본 학자 후지쓰카 지카시가 수집한 책들을 정민 교수가 촬영했다. 문학동네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