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크게보기 대만 타이베이에 있는 일본 신사. 공성구 등 개성상인들은 대만 정벌을 시도했던 기타시라 가와노미야를 기리는 이 신사를 참배하고 기념사진을 찍었다. 태학사 제공

향대기람 / 공성구 지음, 박동욱 옮김 / 태학사

손에 딱 쥘 만한 판형에 187쪽 분량. 가벼운 책인데, 읽고 나면 그 여운이 묵직하다. 이 책에 등장하는 개성상인들의 모습은, 한국 자본주의 초기 공간을 일군 진취성의 표상인 동시에 물신(物神) 숭배에 사로잡힌 악덕 상혼의 증좌이기도 하다. 지난 4월 16일에 발생한 세월호 참사의 배후에 물신이 자리하고 있음이 백일하에 드러나고 있는 시점이어서 이 책을 읽는 심정은 복잡미묘할 수밖에 없다.

일제강점기인 1928년, 개성상인 손봉상(孫鳳祥)과 공성학(孔聖學)은 삼업조합(蔘業組合)의 조합장과 부조합장 신분으로 홍삼 판로를 시찰하기 위해 대만과 홍콩으로 43일간의 여행을 떠난다. 이 여행에는 조선총독부로부터 홍삼판매권을 불하받은 일본 미쓰이(三井)사의 직원 아마노 유노스케(天野雄之輔)가 동행했다. 당시 개성 삼업조합과 미쓰이사는 동아시아의 홍삼 판로 개척이라는 공동의 이익을 위해 긴밀하게 협력하던 사이였다. 이때 함께 갔던 공성학의 사촌동생 공성구(孔聖求)가 한문으로 여행일기를 남기는데, 그게 이 향대기람(香臺紀覽)이다. 홍콩(香港)과 대만(臺灣)을 살펴본 여행기라는 뜻이겠다.

일행은 5월 1일 부산에서 출발해 그해 6월 10일까지 시모노세키(下關), 대만, 홍콩, 마카오, 상하이(上海)를 둘러봤다. 동아시아가 격동하던 시기였던 탓에 이들이 들른 각 도시의 분위기는 그리 평화롭지만은 않았다. 중국 각지에서 배일감정이 격화해 엔화도 받지 않을 정도였다고 하는데, 여행기에서 나타난 개성상인들의 반응은 덤덤하다. 일본의 식민지배에 대한 비판적 시선은 전혀 보이지 않을뿐더러, 일본과 대만 등에 있는 신사는 꼬박꼬박 참배한다.

실제 이 책에 등장하는 손봉상, 공성학 등 개성상인들은 친일 행적이 뚜렷한 인물들이다. 미쓰이사는 이들의 협력을 얻어서 조선의 홍삼판매권을 장악했고, 그에 보답하기 위해 그들의 여행에 회사 직원을 보내 각종 편의를 제공한 것이다.

여행기의 곳곳에는 당대 역사의 격랑과는 상관없이 웃음과 노랫소리가 낭자하게 흐른다. 현지 기생들을 끼고 놀아난 술판에서 흘러나온 것이다. 그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한숨이 절로 나온다. 한국 자본주의 초기사의 한구석에 낀 이런 부패가 오늘날까지 이어져 결국 저 4월 16일의 대참사를 불러온 것이려니….

주지하다시피, 일본의 아베가 일제강점기의 각종 악행을 인정하지 않는 바탕에는 일제가 한국 자본주의 발전에 기여했다는 인식이 깔려 있다. 일본 극우주의자들에게 그런 허위의식을 심어준 자들은 바로 이 일기에 나오는 인물들과 같은 친일 부류일 것이다.

이 책의 아이러니한 가치 중의 하나는 일제와 손잡은 자들의 행적이 객관적으로 묘사돼 있다는 점이다. 친일 행적이란 본시 다른 이가 손가락질하고 스스로는 손사래를 치는 것으로 논란이 되는 것인데, 일부 개성상인들이 자신들의 친일 여정을 상세히 그려놓고 있으니 그 시절을 객관적으로 알고 싶은 후세로서는 그저 고마울 따름이라고 해야 할까.

당시로서는 드물게 대만과 홍콩을 시찰한 상인들의 시선으로 그곳의 풍물을 실컷 구경할 수 있다는 것을 이 책의 장점으로 칠 수 있겠다. 근대 한문학의 마지막 모습이라는 점도 의미가 있다.

꼼꼼한 번역과 해제가 돋보인다. 당시의 풍정을 알 수 있게 하는 도판과 사진 자료가 풍성한 것도 좋다. 여러 가지로 복잡한 심정이 엄습하지만, 근대사에 관심있는 이들에게 일독을 권할 만한 책이다.

문득 궁금해진다. 개성상인들의 모습을 담은 대하작품 ‘미망’을 남겼던 고 박완서 작가가 이 책을 읽는다면 무어라고 말할까.

장재선 기자 jeijei@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