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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문을 지나면 무병장수한답니다. 여러 번 왔다갔다하면 영원히 살 수도 있을까요.”

리시버를 통해 나긋나긋한 해설사의 음성이 들린다.

보름달 아래 청사초롱을 든 관람객들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고 ‘불로문’을 지난다. 밤이라서일까.

그 누구도 크게 목소리를 높이지 않는다.

몰래 들어온 것도 아닌데 발걸음마저 조심스러워진다.

여기는 1405년 태종 때 건립된 조선왕조의 왕궁, 창덕궁이다.

지난 15일 저녁, 한 회 100명의 ‘선택 받은 자’만 참가할 수 있다는 창덕궁 달빛기행에 나섰다. 궁내는 시공을 초월했다. 서울이라는 대도시 안에서 이렇게 고즈넉한 풍경을 만나다니. 한복까지 차려입고 온 몇몇 관람객 덕에, 마음은 이미 조선으로 떠났다. 청사초롱을 들고 있어도 주의해야 한다. 현란한 도심 조명에 익숙해진 눈은 어둠이 당황스럽다. 올해 개방한 낙선재 후원은 창덕궁에서 달을 가장 가까이 만나는 곳. 한국식 정원의 전형인 낙선재 후원 화단을 딛고 올라 서울 N타워와 둥근 달을 감상한다.

드디어 후원(後苑). 주합루와 부용지는 달빛기행의 절정이다. 가야금 소리를 들으며 영화당 옆에서 가쁜 숨을 고른다. 다음은 연경당. 1828년(순조 28년)에 사대부 살림집을 본떠 지어진 접견실로, 달빛기행 때는 작은 공연장으로 변신한다. 궁중무용과 판소리 등 20여 분간 3∼4개 공연이 이어져 지루할 틈이 없다. 다만 봄바람이 조금 차다. 공연장에 마련된 따뜻한 대추차가 어찌나 반가운지.

올해로 5년째를 맞은 창덕궁 달빛기행은 10여 년 전부터 개방과 활용을 시작한 궁궐 프로그램의 정점이다. 4대 궁 중 가장 원형 그대로의 모습을 간직한 창덕궁은 경복궁, 창경궁, 덕수궁 등 다른 궁보다 폐쇄적인 공간이었다. 후원 관람도 여전히 제한적이다. 그런 창덕궁이 일반에 관람을 허용하고, 밤 궁궐 탐방이라는 프로그램을 통해 색다른 빛을 발산한다. 문화유산에 대한 높아진 관심과 늘어난 여가시간. 지금, 달빛기행이 인기가 없다면 그게 더 이상하다. 김원기 문화재청 활용정책국장은 “달빛기행은 2분 만에 예약이 끝난다. 암표까지 있다는 소문을 들었다”고 전했다. 이 밖에 창덕궁에서는 ‘청의정 농경체험’ ‘후원에서 만나는 한 권의 책’ ‘고궁에서 우리 음악 듣기’ 등을 실시하고 있다.

요즘 젊은이들에겐 백일장과 소풍, 각종 궁궐 프로그램과 달빛기행으로 ‘궁궐 입성’이 자연스럽지만 사실 궁이 우리 곁에 친근하게 다가오게 된 건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본격적으로 ‘시민과 소통’하게 된 건 2005년 6월 경복궁 경회루가 공개되면서부터다. 그러니 10년이 채 안되었다. 광화문을 가로막은 조선총독부 건물과 창경원 시절을 기억하는 중년 이상 세대에겐 격세지감이 느껴질 것이다. 경복궁관리소의 장재혁 연구사는 궁의 변화에 대해 문화유산 보존정책이 뉴패러다임을 맞았다고 이야기한다. 즉, 높아진 문화 향유권으로 인해 문화재의 활용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 장 연구사는 “종묘와 창덕궁이 유네스코(유엔교육과학문화기구)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면서 관심이 고조됐고, 주 5일 근무가 확대 시행됨에 따라 문화 향유권에 대한 욕구가 갈수록 증가했다”며 “문화재 보존정책이 폐쇄 위주의 보호정책에서 개방과 소통의 활용을 병행하는 정책으로 패러다임 전환기를 맞게 됐다”고 전했다.

14일 오후에는 경복궁 경회루 2층 누각에 올랐다. 활용뿐 아니라 보존까지 고려해야 하니 예약제로 운영된다. 그래서인지 생각보다 관람객이 별로 없다. 사전 정보가 없던 사람들은 연못 너머에서 아름다운 경회루를 눈에 담는 걸로 아쉬움을 달래야 했다. 경복궁은 1990년대부터 변신을 거듭하고 있다. 500여 동이 있었던 고종 중건 당시의 모습으로 복원사업이 진행중인 것.

복원은 현재 25%가량 완료되었고, 전체 완공까지는 아직 15년이 더 남았다. 올해 말 완공되는 소주방(燒廚房) 공사도 흥미롭다. 드라마 ‘대장금’ 속에서 보았던 궁중음식을 만들던 장소다.

창경궁과 덕수궁의 변화는 비교적 적다. 그러나 접근성을 따지자면 이만한 곳이 없다. 특히 덕수궁은 4대 궁 가운데 유일하게 휴관일(월요일)을 제외하고 매일 오후 9시까지 개방하고 있다. 낮 동안 이뤄지는 왕궁 수문장 교대의식은 이미 인근 직장인들과 해외 관광객들에게 서울시청 인근의 색다른 볼거리로 자리 잡았다.

덕수궁은 올해 또 다른 변화를 예고하고 있다. 2009년 복원공사에 들어간 덕수궁 석조전이 오는 6월 원래의 모습을 되찾아 다시 문을 여는 것이다. 정부는 5년간 141억 원을 투입해 석조전을 원형에 가깝게 복원 중이다. 박정상 문화재청 덕수궁관리소장은 “6월에 시범적으로 문을 연 뒤 10월부터 본격적인 개방을 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창경궁은 오는 29일부터 5월 11일까지 야간 개방(오후 7∼10시)을 실시한다. 지난해는 봄과 가을에만 야간 개방 행사를 운영했으나, 올해는 사계절 모두 야간 개방 기간을 가질 예정이다. 1일 야간 개방 방문자 한도도 기존 1700명에서 2200명으로 늘렸다. 지난해의 경우 예매 시작 2시간 만에 표가 동이 나는 등 인기가 높았다.

박동미·유민환 기자 pdm@munhwa.com

이미지 크게보기 지난 15일 저녁 창덕궁 달빛기행에 나선 관람객들이 주합루 앞에서 고즈넉한 궁궐 풍경을 즐기고 있다. 정하종 기자 maloo@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