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크게보기 1909년, ‘대한민보’ 1면에 실린 이도영 화백의 시사만평. 왼쪽 만평은 계몽 지식인들이 완고배(구습에서 벗어나지 못한 자)를 꾸짖는 내용이며, 오른쪽 만평은 관료가 황실 문화재를 빼돌린 사건을 전당포에 팔아먹는 모습으로 풍자하고 있다. 천년의상상 제공

저잣거리의 목소리들 / 이승원 지음 / 천년의상상

멸망을 앞둔 제국에서 평범한 사람들의 세상살이는 어떤 모습일까. 때때로 로마, 몽골 등 많은 제국의 멸망사를 듣게 되지만 모두 황제나 귀족 혹은 영웅들의 이야기다. 혼돈의 시기를 맨몸으로 부딪힌 일반 군중의 목소리는 쉽게 들을 수 없다. 그저 사회적 혼란기인 만큼 ‘굉장히’ 힘든 일상이었을 것이라는 상상에 그칠 뿐이다.

여기 멸망하는 제국에서 살아가는 장삼이사(張三李四)들의 이야기가 있다. 먼 나라의 일도 아니다. 우리에게도 ‘대한제국’의 역사가 존재한다. 하늘로 여겼던 황제의 몰락과 러시아·일본 등 몰려오는 열강, 주자학적 세계관의 폐기와 서구 중심 세계관의 등장, 야만으로 폄하된 생활 풍속과 문명으로 칭송된 서양 문물. 대한민국도 아닌, 그렇다고 조선도 아닌 겨우 13년간 존재한 ‘한반도의 제국’은 이런 거대한 소용돌이 속을 걸어가야 했다.

한국 근현대의 풍속을 연구한 문화학자 이승원이 쓴 책은 급변의 대한제국에서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사를 재현해내고 있다. 당시는 세기말적 분위기 속에 무당과 점쟁이가 많았다. 민중의 불안한 마음이 커질수록 무속신앙은 더욱 활개를 쳤다. 서울에서 활동한 무당과 점쟁이가 1000명이 넘었고, 고종과 명성황후마저 무당과 점쟁이에게 휘둘렸다. 특히 임오군란으로 지방에 피신한 명성황후의 환궁일을 맞힌 무당은 ‘진령군’이라는 벼슬에 봉해져, 인사까지 좌지우지했다. 진령군의 소개로 관직에 든 이유인은 미천한 신분에도 국법 집행의 수장인 고등재판소 재판장에 올랐다.

러시아어나 일본어를 할 줄 아는 사람도 단번에 권력의 중심으로 떠올랐다. 통역관(통변)이 된 그들은 일부러 말을 틀리게 전하거나 없는 말을 지어내 자신들의 잇속을 챙겼다. 일본 관료가 점찍은 인물이라고 속여 지인을 관직에 들게 했고, 소문을 지어내 자신과 척을 진 사람의 재산을 빼앗았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고용살이를 했던 김홍륙은 러시아어를 할 줄 아는 몇 안 되는 조선인이었고, 이것 하나로 합부협판(지금의 교육부 장관) 자리까지 지냈다.

또한, 대한제국 시기에는 계몽의 일환으로 단발령과 함께 위생의 중요성이 강조되면서 이발소, 목욕탕, 세탁소가 신문화로 떠오르기도 했다. 사진기의 등장으로 저잣거리에서 ‘양인(洋人)이 어린아이를 삶아 먹고 눈알을 뽑아간다’는 소문이 널리 돌아 고종이 나서서 사실이 아니라는 담화문까지 발표하는 일이 벌어졌다. 급변하는 시대가 가져온 웃지 못할 해프닝이다.

저자는 이 같은 변화상을 그려내기 위해 자강운동 조직 대한협회의 기관지인 대한민보의 시사만평(이도영 화백)을 중심으로 독립신문, 제국신문, 매일신문, 황성신문, 만세보 등에 실린 기사와 광고를 참고했다. 특히 당시 사건과 사고, 그중에서도 잡보·기담·지방 통신 등이 담긴 각 신문 3면을 택했다. 대한제국의 신문들 3면은 사실과 소문, 유언비어가 한데 섞인 미디어였고, 오히려 이 ‘잡탕’이 세기말의 불안한 시대상을 잘 반영하고 있다는 것이 이유다. 소문과 풍문은 불안을 먹고 자라고, 대한제국은 이 불안의 요소를 잘 갖춘 곳이었다. 책은 ‘스캔들-권력자의 성적 문란과 도덕적 해이’ ‘성병-성생활도 국가가 관리해드립니다’ ‘생계형 협력자-‘한일합방’을 꼭 이뤄주세요’ 등 15장으로 나눠 대한제국을 분석하고 있다. 당시 분위기를 한눈에 파악할 수 있는 사진자료 64장도 담겨 있다.

유민환 기자 yoogiza@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