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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학으로 피아노를 공부한 가난한 20대 남성, 상류층의 일원으로 완벽하게 편입하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던져 앞만 보고 달려온 40대 여성이 슈베르트의 ‘네 손을 위한 판타지아’를 연주하며 나누는 정서적 교감은 말 그대로 예술이었다. 음악을 잘 아는 누군가는 그녀와 그의 관계를 프랑스 작가 조르주 상드와 피아노의 시인 쇼팽에 비유하면서 예술적으로 포장하기도 했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관계가 ‘불륜’이라는 것을 이미 분명히 알고 있었다. 금지된 사랑이기에 애써 감추려 했지만, 그럴수록 점점 더 강해지는 그들의 욕망이 드러나는 순간은 아무리 애를 써도 예술로 승화되기 어려운 불륜의 시간일 뿐이다.

‘예술재단 기획실장’이라는 그럴 듯한 명함을 갖고 있지만 실상은 재벌가의 ‘우아한 노비’에 지나지 않는 ‘오혜원(김희애 분)’과 자신의 재능을 모르고 살아온 천재 피아니스트 ‘이선재(유아인 분)’의 음악적 교감과 격정적인 사랑을 그린 ‘밀회’는 매우 잘 만든 멜로드라마이다. 우아함과 천박함의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넘나드는 밀도 있는 대사와 감성을 자극하는 피아노 음악, 그리고 사물에까지 감정을 부여하는 감각적이면서도 절제된 연출은 윤리적으로 허용되지 않는 사랑의 절절함과 그만큼의 비참함을 제대로 보여준다.

멜로드라마는 윤리와 도덕이 무너진 극적 세계를 통해 현실 세계의 윤리와 도덕을 역설하는 장르드라마이다. ‘밀회’에서 오혜원과 이선재의 불륜이 예술적 교감으로 포장되는가 하면, 그들의 사랑이 억눌린 욕망에 대한 판타지를 자극하고 그것이 다시 현실의 윤리와 도덕을 환기시키는 것도 그래서이다. 사회적 지탄을 받아 마땅한 오혜원과 이선재의 감정에 동조되는 것은 욕망이고, 그들의 관계가 드라마에서나 가능한 상황일 뿐임을 강조하는 것은 절제이다. 극적 상황에 대한 욕망과 현실 세계의 절제가 공존하는 것이다.

그러나 ‘밀회’는 숨김과 드러남 또는 절제와 폭발과 같은 이항대립적인 장치와 상황들을 통해 오혜원과 이선재의 사랑이 판타지가 아니라 현실임을 지속적으로 환기시킨다. 상류층의 허위와 속물근성을 우아하게 관리하던 오혜원이 이선재와의 관계 때문에 약점을 잡히고, 그로 인해 상류층이 되기 위해 긴장을 늦추지 않고 애써 올라갔던 계단 위에서 추락할지도 모르는 상황에 처할수록 그들의 음악적 열정은 절정으로 치달을 것이다. 솔직한 사랑에 대한 갈망,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선재의 방에 들어가기 위해 좁은 계단을 올라가면서 오혜원이 느꼈던 무서움을 함께 보여주는 것도 마찬가지 이유에서이다.

사랑은 여러 가지 감정으로 표출된다. 누군가에겐 가슴 절절한 고통이고 또 다른 누군가에겐 그 무엇으로도 표현하기 어려운 희열이다. 사랑 때문에 상처를 받는가 하면 반대로 상처를 주기도 한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사랑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걸기도 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랑 앞에서 주체가 되지 못한다. 자신의 몸을, 그리고 마음을 장악하지 못하고 타자의 시선에 휘둘리면서 사랑의 주체성을 확립하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내가 내 삶의 주인”이 돼 보지 못한 오혜원, 그런 그녀가 행복하기만을 바라며 감정에 충실한 이선재와 은밀한 만남을 지속할수록 판타지에 대한 열망은 점점 더 뜨거워질 것이다. 윤리와 도덕이 은폐시킨 욕망, 또는 법과 제도가 금지한 사랑 앞에서 오혜원과 이선재가 어떠한 선택을 하게 될지 궁금하다. 권력과 자본으로 문화예술마저 장악한 상류층의 위선과 비리의 강도만큼 강하고, 하지만 그것보다 0.2% 더 처참해질 오혜원과 이선재의 관계 속에 우리 사회의 윤리와 도덕의 수준이 투영돼 있는 것은 아닐까?

충남대 교수·드라마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