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협/정치부 차장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가 23일 네덜란드에서 “과거사를 겸허한 자세로 대하고 다음 세대에 역사의 사실을 전하겠다”고 말했다. 헤이그 핵안보정상회의 참석차 암스테르담에 있는 ‘안네 프랑크의 집’, 나치 점령기 프랑크 가족이 숨어살던 집에 세워진 박물관을 찾은 자리에서다. 아베 총리는 20세기 기본권 침해를 거론하며 “일본은 절대 반복하지 않겠다”고도 했다. 불과 몇 시간 전, 아베 총리의 최측근 하기우다 고이치(萩生田光一) 중의원 의원은 후지TV에 나와 일본군 위안부 동원의 강제성을 사죄한 고노담화에 대해 “검증결과 새로운 사실이 나오면 새 담화를 발표하면 된다”고 말했다. 고노담화를 계승하느니, 고치느니 하루가 멀다하고 식언해온 아베 총리는 물론이고, 내각의 핵심 멤버들 모두 이중 플레이, 국제적 사기의 달인이라 할 만하다.

태생적으로 사디스트의 DNA를 갖고 있는 게 아니라면 이렇게 다른 나라 국민들에게 정신적 학대를 가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다. 박근혜 대통령도 대상에서 예외가 아닐 듯하다. 박 대통령은 25일 헤이그에서 집권 후 처음 아베 총리와 얼굴을 마주대한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의 중재 노력을 감안해 한·미·일 정상회담의 모양새를 빌린 만남이다.

박 대통령은 때마다 “대화를 위한 대화는 할 수 없다”고 강조해왔다. 집권 초만 해도 북한을 겨냥한 압박과 설득 차원의 발언이었으나 어느 시점부턴가 이 자리를 북한 대신 일본이 차지했다. 아베 총리의 결자해지와 도발 중단을 촉구하는 의미다. 진정성이 확인되지 않으면 만나봐야 서로 득될 게 없다는 판단에서다. 요즘은 누구를 말하는지조차 전후 맥락을 살펴보지 않으면 구별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 우방끼리 이래야 하니 대북관계보다 훨씬 서글픈 일이다. 왜 이렇게 됐을까. 꼼꼼히 따져보니 아베 총리의 정치 행태와 외교 수법이 김정은 북한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을 닮아가고 있었다.

닮은꼴 김정은과 아베. 이제는 김 제1위원장이 이런 비교를 창피하다고 여길지 모르겠다. 최근 아산정책연구원이 전국 1000명을 상대로 한반도 주변국 국가원수에 대한 호감도를 물었더니 아베 총리(3%)가 김 제1위원장(6%)을 제치고 꼴찌를 기록했다. 뒤집으면 ‘아베보다 김정은이 차라리 낫다’는 의미다. 시도때도 없이 연중 진행되는 도발 패턴도 비슷해졌고, 국제사회의 충고를 무시하고 혼자만의 논리와 허황된 생각에 사로잡혀 있다는 점도 닮은꼴이다. 김 제1위원장은 핵을 꼭 쥐고 있어야 산다고 생각한다. 아베 총리는 전범국 일본의 패전 뒤 형성된 전후 질서를 부인하며 질곡을 극복한답시고 역사왜곡이라는 2차 전범 행위를 서슴지 않으면서까지 국가 자존심 회복에 나섰다. 국제사회에서 용인받기 힘든 침략적 인식들이다. 북한이 직접적으로 생명을 위협한다면, 일본은 보다 교묘한 수법을 구사한다. 대장 아베 총리가 국가총동원령을 내린 듯 장·차관들을 이끌고 심야마다 벌이는 과거사 ‘폭주족(族) 만행’은 국민들을 불면증에 걸리게 만들었다. 치고 빠지기 수법도 닮았다. 한·미·일 정상회담 뒤에도 아베 총리가 언제 뒤통수를 칠지는 장담할 수 없다. 마인드셋을 고쳐먹지 않는 한 김정은 체제나 아베 체제에 기대할 게 없다면 결국 레짐체인지만이 해결의 물꼬를 틀 수 있다는 점에서 서로에게 불행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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