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땅에서 일제강점기의 상처가 가장 많이 남아 있는 곳은 어디일까요. 대개 전북 군산과 전남 목포, 인천 등의 항구도시가 꼽히지만, 제주도도 못지 않습니다. 해안마다 남아 있는 진지동굴과 토치카는 이루 헤아릴 수 없고, 한라산 둘레를 따라 일제강점기에 놓인 병참도로도 있습니다. 군산, 목포, 인천에 남아 있는 것이 주로 일제의 수탈 자취라면 제주에 남아 있는 건 노역과 전쟁의 흔적입니다.

제주 서남쪽 송악산 북쪽의 대정읍 들판에는 지금은 폐허가 된 알뜨르 비행장이 있습니다. 1926년부터 10년에 걸쳐 모슬포 일대 주민들의 강제노역으로 지어진 서울 여의도 크기의 거대한 비행장입니다. 활주로가 있었던 자리는 모두 푸른 밭이 됐지만, 아직도 시멘트로 지은 격납고는 옛 형태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알뜨르란 이름은 제주 사투리로 아래를 뜻하는 ‘알’에다 들판을 뜻하는 ‘뜨르’가 따라붙어 지어진 이름이랍니다. ‘아래 들판’이란 서정적인 이름과는 달리 알뜨르 비행장은 대동아전쟁 당시 일본군의 전략기지로 활용됐습니다. 제주에 비행장은 이것만은 아니었습니다. 지금 제주공항의 자리에는 정뜨르 비행장이, 조천읍에는 진뜨르 비행장이 있었고, 제주 동쪽 교래리에는 일본군의 비밀 비행장이 있었습니다. 짐작하시다시피 모두 일제강점기 전쟁의 와중에 전략적 필요에 의해 지어진 것들입니다.

알뜨르 비행장은 1937년 발발한 중일전쟁 때 중국 난징(南京) 공습의 디딤돌로 사용됐습니다. 일본 본토에서 출격한 폭격기는 알뜨르 비행장에서 연료를 공급받고 여기서 다시 난징까지 날아가 폭격을 퍼부었습니다. 이듬해 알뜨르 비행장에 주둔하던 오무라 항공대가 중국 상하이(上海)로 옮아간 뒤에는 복엽기 ‘아카톰보’의 연습비행장으로 쓰였습니다. 이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일제는 침략의 야욕으로 전쟁을 준비하고, 또 결행했습니다.

최근 몇 년 동안 제주를 찾는 중국인 관광객은 크게 늘어난 반면, 일본인 관광객의 발길은 뚝 끊겼습니다. 가장 큰 요인은 엔화 가치 하락 때문이겠지만, 한·일 간의 갈등도 원인인 듯합니다. 세계적인 명소가 된 제주가 세계인들에게 발신하는 가치는 ‘평화’입니다. 정부는 지난 2005년 1월 제주도를 ‘세계 평화의 섬’으로 지정했습니다. 제주는 몽골의 침략과 일제강점기를 거쳤으며 비극적인 4·3사건도 겪었습니다. 제주가 당당하게 ‘평화’를 얘기할 자격이 있는 건, 이렇듯 수많은 아픔이 있었기 때문일 겁니다. 피해자들이 평화를 말하고 있는데, 정작 가해자였던 일본의 정치지도자들이 요즘 보이고 있는, 상식을 넘어선 행태는 할 말을 잊게 만듭니다. 혹 제주에 가시게 된다면 알뜨르 비행장이나 제주전쟁역사평화박물관을 꼭 한 번 들러보시길…. 무릇 평화는 전쟁을 잊지 않는 것에서 시작되니 말입니다.

박경일 기자 parking@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