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영우/한반도미래포럼 이사장

올 들어 북한의 변신이 어지럽다. 가히 스토킹 수준의 구애 끝에 북한의 진정성을 의심하던 우리 정부를 남북 고위급 접촉에 끌어내는 데 성공했을 뿐 아니라, 단 2차례의 접촉만으로 상호 비방·중상 중단 합의(合意)라는 뜻밖의 성과를 거뒀다. 협박과 공갈을 일삼던 북한이 갑자기 평화 공세로 선회한 이유는 무엇일까? 한마디로 말하면 한국의 경제적 도움이 절박했고, 그동안 박근혜정부를 시험해본 결과 공갈과 협박만으로 대북 정책을 자신들의 입맛대로 바꾸기 불가능하다는 판단도 작용했을 것이다. 이명박정부 5년 간 상황 판단을 그르친 탓에 뼈아픈 대가를 지불한 학습효과도 있었을 것이다.

김정은에게 자신의 권력 기반을 다지고 김일성 왕조의 ‘종묘와 사직’을 보전하는 것보다 중요한 일은 없다. 이를 위한 최우선 과제는 핵·경제 병진정책의 성공을 통해 민생고를 해결하고 외부 정보의 유입을 막아 주민들의 ‘김일성교(敎)’에 대한 흔들리는 신앙심을 다잡는 것이다. 이 핵·경제 병진정책의 성패는 소요 재원의 조달에 달려 있다. 그래서 외자 유치를 위해 경제특구 기공식을 요란하게 했지만 투자하는 외국기업이 없다. 다행히 아직도 일말의 희망을 걸 수 있는 곳이 하나 남아 있다. 바로 한국이다. 북한으로서는 5·24조치만 해제돼도 3차 핵실험 이후 목을 죄어오는 국제 제재망에서 탈출구를 찾을 수 있고 급전을 조달할 길이 열린다.

또 하나, 핵·경제 병진정책에 필요한 돈을 마련하는 일보다 더 중요하고 긴박한 과제는 남북 간 비방·중상 중단 합의의 복원이다. 북한이 말하는 비방·중상은 외부 세계와 북한 체제에 대한 진실을 북한 주민들에게 전파하는 모든 행위다. 그 중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 김일성 일가와 김정은의 지도력에 대한 언론의 보도와 전단 살포 및 대북 심리전이다. 체제를 지탱하는 ‘김일성교’에 대한 주민들의 신앙심과 충성심을 파괴하는 주범이기 때문이다.

김정은이 행사하는 무소불위의 권력은 당 제1서기와 최고사령관이라는 세속적 지위와 ‘김일성교’의 교주라는 종교적 지위에서 나온다. 그러니 김정은에 대한 불경스러운 표현은 곧 ‘김일성교’의 신도들에게는 ‘최고 존엄’의 모독이자 ‘신성모독(神聖冒瀆)’이다. 진실이라는 외부의 적을 막아내지 못하면 김정은 체제는 소멸을 면키 어렵다. 결국 비핵화 외에는 모든 것을 다 걸고라도 반드시 관철해야 할 지상과제다. 최악의 경우 쌀·비료·현금마저 포기하더라도 비방·중상 중단 약속만은 받아내야 하는 것이다.

남북 국방 당국은 2004년 6·4 합의를 통해 상호 비방·중상과 심리전을 중단키로 했었다. 그런데 2010년 천안함 폭침에 대한 응징의 일환인 5·24 조치를 통해 이를 폐기한 것이다. 이후 북한은 모래·자갈·농수산물 등의 대남 수출길이 막혔고 이로 인해 연간 5억 달러에 이르는 경제적 손실을 봐야 했다. 그뿐 아니라 그보다 훨씬 더 소중하게 여기는 6·4 합의를 잃었다. 이번에 천안함 사과 대신 이산가족 상봉 카드 하나로 6·4 합의를 복원한 셈이다.

그러면 북한의 숙원인 비방·중상 중단 합의가 타결됐으니, 이제는 북한의 핵·미사일 실험이나 군사 도발을 걱정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을까? 하지만 북한의 도발 가능성을 과소평가하는 것은 금물이다. 핵실험이나 군사 도발을 자행할 경우 비방·중상 중단 합의가 폐기되는 건 말할 것도 없고 핵 포기 결단을 내리지 않고는 버틸 수 없는 수준의 새로운 대북 제재가 추가될 것이라고 북한이 믿는다면 도발 억제 효과가 전혀 없지는 않을 것이다.

문제는 비방·중상의 정의와 합의의 범위에 대한 남북 간의 근본적인 인식 차이에 있다. 북한은 우리 정부의 대북 방송과 언론의 객관적인 사실 보도에 대해서도 비방·중상으로 간주해 트집을 잡을 수 있고, 정부가 민간 단체의 대북 심리전과 언론의 ‘최고 존엄’ 모독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한다는 이유를 들어 자신들이 직접 나서서 이들을 물리적으로 응징하겠다고 나설 가능성도 있다. 북한이 전술적 변신을 하고 남북 관계에서 좀더 세련된 수법을 구사한다고 해서 대남 전략이 바뀌었다고 착각해선 안된다. 언제든지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갈 가능성을 결코 과소평가해서도 안됨은 물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