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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소용돌이에서 스러져 간 민초들의 삶을 짚는 연극들이 관객의 호응을 얻고 있다. 6·25전쟁을 배경으로 한 연극 ‘나와 할아버지’ ‘벽 속의 요정’과 전쟁에서 돌아온 병사의 정체성 상실을 그린 ‘은하수를 아시나요’다. 세 작품은 공히 역사적 격변으로 인해 개인의 삶이 송두리째 뿌리 뽑히는 참상을 보여준다. 아울러 그 와중에도 자신의 인간성을 잃어버리지 않으려는 등장인물들의 발버둥이 애잔하게 펼쳐진다.

우선, 지난 7일부터 4월 20일까지 서울 종로구 대학로 아트원씨어터 3관에서 공연하는 ‘나와 할아버지’는 6·25전쟁에서 국군으로 참전해 한쪽 다리를 잃은 할아버지와 손자 간에 벌어지는 일화를 그리고 있다. 극작과 연출을 맡은 민준호 씨가 실제로 자신과 할아버지 사이에 있었던 일을 바탕으로 희곡을 썼다. 그만큼 현실감이 생생하게 살아 있는 연극이다.

연극은, 혈기 넘치는 공연대본 작가 ‘준희’가 작품의 소재를 찾던 중 자신의 할아버지를 관찰하는 데서 시작한다. 할머니와 늘 티격태격하는 할아버지는 구두쇠에 완고하기만 하다. 하지만 할아버지는 전쟁 통에 헤어진 자신의 ‘옛사랑’을 찾기를 원한다. 이 여행길에 동행하게 된 준희는 자신이 상상할 수조차 없었던 할아버지의 삶과 맞닥뜨리게 된다.

연극 ‘나와 할아버지’는 준희와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마치 한 편의 수필처럼 솔직하고 담백하게 풀고 있다. 할머니의 잔소리에도 불구하고 옛사랑을 찾아 나서는 할아버지, 자물쇠로 방문을 잠그고 다닐 만큼 할아버지의 간섭이 싫은 할머니 등 노인들의 실생활과 그들의 속마음이 실제 상황인 듯 무대에서 펼쳐진다. 극 중에선 무엇보다 좌우익이 엎치락뒤치락하는 전쟁터에서 어느 쪽에 서든 희생당할 수밖에 없는 민초들의 애환이 절실하게 그려진다. 1600-8523

연극 ‘벽 속의 요정’은 배우 김성녀의 열연으로 이미 그 진가가 널리 알려진 작품. 지난 2005년 초연했던 연극은 올해 10주년을 맞아 서울 중구 명동예술극장에서 지난 4∼16일 기념공연이 진행됐다. 명동예술극장 공연 중 유일하게 전회(全回) 기립박수를 받은 ‘벽 속의 요정’은 이념 대립으로 인해 벽 속에 갇혀 지낼 수밖에 없는 아버지의 삶을 통해 가족 간의 사랑을 감동적으로 보여준다. 벽 속의 아버지는 다섯 살짜리 딸 ‘순덕’에겐 요정이자 둘도 없는 친구이며, 가족을 지켜주는 수호신의 역할을 한다.

‘벽 속의 요정’은 혹독할지언정 살아남은 자들이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삶에 대한 놀라운 긍정을 보여준다. 혼자서 1인 32역을 감당하는 김성녀는 “살아 있으니 우린 함께 울 수 있잖아”라고 노래하며, 살아 있는 자체가 아름다운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강제로 지워져야만 했던 아버지의 삶과 고난을 이기고 살아온 어머니의 삶이 씨실과 날실로 교직되면서 깊은 감동과 여운을 남긴다.

독일 작가 칼 비트링거 작(作)의 연극 ‘은하수를 아시나요’(사진)는 정신병원에 입원해 틈틈이 우유배달을 하는 괴짜 환자 ‘샘’이 의사 ‘노이로스’의 진료실에 잠입하면서 시작한다. 샘은 자신이 쓴 희곡을 함께 공연하자고 의사에게 제안한다. ‘인간을 알수록 연기하기가 힘들어’ 한때의 배우 생활을 접었던 노이로스는 샘의 제안을 받아들인다. 드디어 샘과 노이로스가 공연하는 1인 다역의 극중극이 병원 환자들 앞에서 펼쳐진다.

15년 만에 전선에서 고향에 돌아온 샘은 자신이 이미 전사자로 처리됐음을 알게 된다. 그의 삶은 공적으로 정리돼 말소된 상태. 샘은 전쟁터에서 훔친 신분증으로 전사자 ‘요하네스’의 삶을 살기로 결심한다. 하지만 요하네스로서의 삶 또한 만만치 않다. 감언이설과 협박, 사기로 샘을 이용하는 사람들에 의해 결국 샘은 목숨을 건 서커스 공연 무대에 서게 된다. 역사적 격변 속에서 한 인간의 삶이 얼마나 참담해질 수 있는가를 연극은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3월 9일까지 서울 종로구 대학로 설치극장 정미소에서 공연. 02-734-7744

김영번 기자 zerokim@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