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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시의 품격 / 김풍기 지음 / 창비

교양저작물을 통해 일반인들이 선뜻 접근하기 어려운 한시 대중화 작업을 해온 김풍기 강원대 교수가 들려주는 한시 이야기이다.

글 한편 한편 읽다보면 한시와 한시를 썼던 옛 지식인들 그리고 이들이 한시를 쓰고 읽고 비평하고 감상하던 당대의 풍경이 눈에 보이듯 생생하게 전해진다. 한시를 둘러싼 에피소드들을 흥미롭게 전해주는 방식이기에 큰 부담 없이 쉽고 재미있게 읽을 수 있다.

저자는 옛 선인들에게 한시는 삶 그 자체였다고 설명한다. 입신양명을 꿈꾸며 관직에 나가기 위해 과거를 통과해야 한다는 점에서 ‘권력’이었고, 정반대로 명예나 권력을 버리고 초야에 묻힐 땐 자신의 뜻을 담아내고 삶을 지탱하게 해준 ‘문우’였다. 사대부 커뮤니티에 들어가기 위한 필수 능력인 동시에 풍류이자 지적인 오락이기도 했다.

허름한 행색의 선비가 좋은 시구 하나로 상석에 앉아 명주를 얻어먹는 일화나 선비들이 시 대결을 통해 진정한 고수를 가리는 모습은 텔레비전 사극에서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이 같은 실제적·상징적 중요성 때문에 시귀신 이야기까지 만들어지기도 했다. 예를 들어 일자무식의 시골 선비가 시귀신의 도움으로 뛰어난 시를 지어 과거에 급제했다는 식이다. 시문에 대한 중압감이 시를 매우 신비스러운 성격으로 격상시켰다는 것이다.

이런 부담감 때문이었을까. 저자는 조선 선비들도 표절의 유혹에서 자유롭지 못했다고 한다. 이들의 표절 양상은 오늘날 보다 더했으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 않았다는 것이 저자의 판단이다. 화장을 해서 아름답게 꾸민다는 의미의 장점(粧點)이나 기존 작품을 활용해 자신 만의 독특한 품격을 만든다는 ‘환골탈태법’ 같은 표절과 창작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줄타기하는 수법이 쓰이기도 했다.

아예 권력자가 남의 작품을 자신의 것처럼 내놓기도 했다. 실제로 영의정 유영경은 중국 사신들 사이에서 ‘동방최고의 문장가’로 칭송받았지만, 그의 작품은 모두 당시 동지중추사였던 최립의 작품이었다고 한다. 최립은 당대 8문장가로 꼽힌 인물이었지만 윗사람의 지시에 따라 대신 문장을 쓸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저자는 풀어냈다.

한편 흥미롭게도 저자는 한시가 이 같은 양반의 전유물은 아니었다며 조선 후기에 등장한 새로운 시창작 집단인 중인계층에 주목한다. 조선시대 중인은 양반이 모든 권력을 쥐고 있던 시대와 불화를 겪은 계층이다. 이에 이들은 천기론을 재해석하며 시대의 벽을 허물어갔다.

즉 시는 성리학적 수양을 통해 올바름에 도달해야 자연스럽게 흘러나온다는 양반의 주장에 맞서 본연의 순수함이 자연스럽게 배어 나오는 것이 시라는 견해를 들고 나왔다. 요즘 식으로 풀어보자면 ‘문학 이론에 대한 재해석’을 기반으로 시문 영역에 진입했다. 궁노 출신인 최기남, 역관 시인 홍세태들이 대표 선수들이다.

이에 따라 참된 시문의 절대적 기준이 사라지고 그 대신 작가의 개성이 중요한 문제로 부각하게 됐다고 저자는 설명했다.

최현미 기자 chm@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