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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기란 게 뭔가를 보여줄 수 있는 작품입니다.

내가 20∼30대에 이 연극을 했다면 지금처럼 연기하지는 못했을 거예요.

나이 들어 모노드라마 하기를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연륜이란 돈으로 살 수 없는 거니까요.”

4일부터 서울 중구 명동예술극장에서 공연에 들어간 연극 ‘벽 속의 요정’의 배우 김성녀(64·사진)의 말이다.

지난 2005년 초연 이후 10주년을 맞는 ‘벽 속의 요정’은 ‘김성녀’라는 배우가 아니면 상상조차 안 될 정도로 그녀와 한 몸이 된 작품이다.

10주년을 맞아 옛 국립극장이었던 명동예술극장에서 기념 공연을 하게 된 김성녀는 3일 문화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명동예술극장은 중학생 때 처음 와서 연극을 본 곳”이라며 “1976년 ‘한네의 승천’으로 데뷔한 곳도 명동예술극장이었고, 2009년 재개관할 때 사회를 보기도 했다”고 말했다. 그만큼 김성녀와 명동예술극장의 인연은 남다른 셈이다.

10주년을 맞은 ‘벽 속의 요정’은 2005년 초연 당시 ‘여배우 열전’ 중 한 작품으로 공연됐다. 김성녀는 “초연 당시엔 다른 여배우들에게 지기 싫어서 안간힘을 썼는데 ‘의외로’ 반응이 좋아서 10년째 무대에 오르고 있다”며 “지금은 오롯이 ‘벽 속의 요정’에 몰입해서 내 모든 것을 쏟아붓는다”고 털어놨다.

전혀 의외가 아니었다. ‘벽 속의 요정’은 2005년 올해의 예술상 수상을 시작으로 ‘올해의 연극 베스트 3’(2005), ‘죽기 전에 봐야 할 공연 베스트 10’(2011) 등 잇단 수상과 함께 연극계 안팎의 찬사를 받았다.

그만큼 초연 때부터 관객의 이목을 집중시켰던 것. 당시 객석의 폭발적인 환호에 감격한 김성녀는 “앞으로 10년간 이 작품에 서겠다”고 ‘덜컥’ 약속해버렸다. 이후 10년 세월이 흘렀고, 그는 약속을 지켰다.

“정말 힘든 작품이에요. 모노드라마라 한순간도 쉴 수 없을 뿐더러 설렁설렁 할 수도 없어요. 체력이 달려서 겁나기도 하고요. 하지만 내가 아니면 이 연극을 할 수 없다는 생각으로 전심전력을 다해 왔습니다. 배우에겐 몸이 악기라 음식은 물론이고 생각도 좋게 가지려고 노력합니다. 심신을 건강하게 유지해야 이 작품을 제대로 할 수 있거든요.”

이미 알려졌다시피 김성녀는 이 연극에서 ‘1인 32역’이라는 믿기 힘든 경지를 펼쳐 보인다. 앙증맞은 다섯 살짜리 여자애부터 교복 입은 여학생, 웨딩드레스 입은 신부, 어머니, 아버지, 할머니, 심지어 농부와 경찰에 이르기까지 그야말로 다양한 역을 마치 옷 갈아입듯 순식간에 변모하며 척척 소화해낸다. 목소리는 물론이고, 표정과 동작까지도 한순간에 바뀌는 ‘마술’을 보여준다. 그중에서 가장 힘든 역은 어떤 역할일까.

“나이가 들어서인지 할머니 역이 제일 편해요. 다섯 살 순덕이 역도 어렵지 않아요. 왜, 노인과 아이는 서로 통한다고 하잖아요. 정말 그런 것 같아요. 제일 힘든 역할은 처녀 역입니다. 내가 연기하기엔 아무래도 어색한데, 관객들이 보기엔 어떨지 모르겠어요.”

단연코 어색하지 않다. 처녀 역할을 할 때의 김성녀는 푸릇푸릇한 아가씨 그 자체다. 도대체 그 같은 ‘신출귀몰한 연기’는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김성녀는 “언론인 한 분이 내게 ‘춤과 노래와 연기가 분화되지 않은 배우의 원형을 보여준다’고 평했는데, 그 말에 어긋나지 않게끔 노력할 뿐”이라며 “힘이 닿는 한 배우로서의 본분을 지킬 것”이라고 다짐했다. ‘벽 속의 요정’도 앞으로 할 수 있는 한 계속 무대에 올릴 작정이다.

연극 ‘벽 속의 요정’은 스페인 내전 당시의 실화를 토대로 쓴 일본 작가 후쿠다 요시유키(福田善之)의 원작을 극작가 배삼식이 우리 상황에 맞게 각색 및 재구성한 작품. 6·25전쟁 때 이념 대립의 광풍 속에서 벽 속에 숨어 30년을 살아온 아버지, 남편의 부재와 가난 속에서도 묵묵히 가정을 지켜온 어머니, 벽 속에 요정이 사는 줄로 아는 딸이 만들어가는 가슴 뭉클한 가족애를 그리고 있다. 공연은 오는 16일까지. 1644-2003

김영번 기자 zerokim@munhwa.com,

사진 = 김호웅 기자 diverkim@munhwa.com